▲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본사(本師)는 일반적인 스승이 아니다. 법을 전해준, 깨달음을 인가한 스승이다. 만난 적도 없는 2천 5백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을 전한 본사다. 시간을 초월한다. 스스로 원을 발하고 스스로 정성을 다하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며 결국 스스로 인생과 우주의 비밀을 대원정각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 과정에 아무도 도움이 되지도 알아보지도 못했을 어린 혹은 젊은 대종사. 동네 사람들에게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비쳐지고 깨달음의 경지를 이해해 줄 이 하나 없는데, '그것이 완벽하게 맞다'라고 누군가 인증한다면, 게다가 그 모든 구도의 행적이 다 정상적이다 못해 위대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 환희심은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의 지도 없이, 발심한 동기부터 도 얻은 경로와 행적과 말씀이 딱 부합되는 궤도를 걸었던 존재의 확인이 주는 일체감은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음을 얻은 대종사가 경전으로 서가모니를 알아보며 본사로 삼는 심경을 감히 이런식으로 헤아려본다.

주세성자는 재세 당대에 법을 전하고 인가하는 본사가 따로 없는 것이 맞겠다. 대원정각으로 일시에 깨침과 수행을 마쳐 보보일체 대성경이 되는 주세성자에게 법을 인도하고 인가한 스승이 있다면 위치가 참 난감해질 법하다. 자신의 제자들이 다 주세성자를 따르게 될 것이고, 자신 또한 그럴수 있으니 말이다. 스승을 스승이라 부를수 없고 제자를 제자라 여길수 없다. 지극한 기도와 정성으로 찾아다녔건만 산신도 스승도 결국 만나지 못한 까닭, 그만큼의 정성이면 뭐든 나타났어야 할 법한데도 다 허사가 된 이유가 그것이지 싶다.

불불계세(佛佛繼世), 세상을 주재할 정법을 새로 짜는 주세성자는 몇백년이든 몇천년이든 필요 따라 일정한 시대를 책임지고 온다. 동시대에 태어날 수도, 그럴 이유도 없다. 바통을 직접 주며 이어달리기 하는 성성상전(聖聖相傳)식 본사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수없는 생을 추적해보면 몸을 바꿔 가며 자기가 자기의 본사가 되는 순환이 일어나는 그림이다. 사람에게 인가받고 전수하기보다, 경전을 통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알아본다. 깨달음, 참나, 본성에 대한 기록이 경전이라 가능하다. 과거 자신의 일기를 보면 지난 일을 생생히 기억할수 있듯, 본의가 제대로 살아있는 경전은 불불의 과거시대 일기장인 셈이다.

때를 따라 인간 세상에 몸을 택해 오실 때, 무작위는 아닐진데, 그 장소는 어떻게 선정하실까. 하필 일제강점기 나라도 이름도 없는 조그만 땅 한반도, 한민족이다. 인류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만, 아무리 주세성자라 해도 자신의 법이 길이길이 유전될 조건, 투자 대비 효율성인 가성비를 고려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정법의 씨가 제대로 발아하여 온천지에 편만할 가능성을 정확히 보고 뿌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원대도는 국경도 민족도 종교도 초월한 전반의 것, 온 인류의 것이다. 일체를 하나로 보는 주세성자의 뜻을 참새의 소견으로 보자면, 주세성자께서 법의 못자리판,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으로 삼으신 그 선택의 땅 한반도에 태어나 이 회상을 만난 은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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