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2월26일. 200년 전통의 은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녔던 베어링스 은행이야기다. 1763년 프랜시스 베어링스이 설립해 여러 상류층은 물론 엘리자베스 2세 등 영국 왕실과 관계가 깊어 '여왕 폐하의 은행'이라고까지 불린 이 은행이 파산한 이유는 뭘까.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사이먼 사이넥은 "은행을 파산으로 몰고 간 파생금융상품 딜러인 '닉 리슨'보다 더 큰 재앙이었던 것은 관행을 못본 체하고 넘어갔던 조직 문화였다"고 한다. 은행 전체 매출 10%를 올리고 있던 닉 리슨의 관행적 방식이 잘못되었어도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더욱이 은행계에 도입한 지 얼마 안 된 '선물거래(futures)'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멍청하게 보일까'하는 마음이 언급 자체를 꺼려했다. 사이먼은 "살아있는 조직은 관행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도전한다"고 했다. 혁신은 관행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소태산도 <조선불교혁신론>을 내놓기까지 오랫동안 내려온 종교의 관행을 유심히 살펴봤을 것이다. 아무도 이의제기 하지 않은 채 관행만 남아있던 종교는 죽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없는 산간에 있는 교당, 보통 사람이 배우기 어려운 경전, 사농공상 직업을 놓아버린 생활, 결혼을 금하는 계율, 형식만 남아있는 불공법에서 그는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이같이 표현했다.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을 상대로 된 것인데….(<대종경>서품18)'

산 종교란 단순히 수도와 생활만 병행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종교를 위해 인간이 희생해왔던 관습을 깨야 가능한 것이었다. 종교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종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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