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99년 5월말 기간제 전무출신 서원자 1기이며 현재 모스크바 교당에 재직중인 조우진 교무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차분하고 침착한 후배(구례교당 학생회)였지만 그날따라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였다. "형님! 우리 옛날 학생회 재연합시다. 형님이 앞장 서 주시죠." 큰 망설임 없이 1기에 신청 못한 기간제 전무출신의 한을 너무나도 쉽게 결정해 버렸다. 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은 그렇게 정해졌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몇 번 교당이라는 곳을 따라 가 본적은 있었다. 선생님(교무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이 4축2재 식장 꾸밀 때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마지못해 가곤 했다. 총부에서 오신 법사님들이 써 주고 간 같은 글씨체 찾아 마름모 꼴로 붙여서 그럴싸하게 꾸미고, 빗물에 흙탕물이 튄 화분을 닦으며 꽃잎을 수건으로 일일이 닦아 하얀 전지로 모양을 냈다. 부처님 오신날이 가까워 오면 한되짜리 병에 가느다란 나이론 실을 감아 꽃잎을 만들어 '연꽃을 제법 이쁘게 잘 만든다'는 선생님 말씀에 어깨가 으쓱해졌고, 간사 아닌 간사로 아침에는 33번 저녁에는 28번 종도 자주 쳤다. 학생은 오직 나밖에 없는 교당에서 '마음 찾아보자'는 이런 저런 말씀을 한참 크고 난 이후에야 피가 되고 살이 됐다는 걸 인식 할 즈음 '아! 그것이 성리였구나' 하고 느끼며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명절 때면 처음 부친 전, 과일, 떡등을 정성껏 싸서 교무님께 갖다 드리라는 심부름이 그렇게 싫었다. 북동향을 바라보고 있는 교당을 가려면 스산한 바람과 골목 끝에 위치한 그곳이 교당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상한 점집, 흉가'로 소문이 나서 왠지 낮에도 가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원기55년 6월경으로 기억한다. 교리 강습회에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찬 원불교 구례 선교소에 초청된 강사가 한분은 자애롭고 보름달처럼 둥실둥실한 분이고 한분은 지적이면서 깨끗함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김지현(범타원), 김이현(법타원) 자매 법사였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맨 앞자리에 자리했다. 범타원님의 '일체 유심조' 법문 말씀과 법타원님의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짓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주제 강의는 어린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두 분의 사자후는 대단했다. 흉내를 잘 내는 나는 그때의 법문 말씀과 제스쳐까지 대충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집중해서 듣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내가 50~60년 후 없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며 방황을 했었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원불교 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재미있고 보람되고 열성적으로 참여한 학생회였다.

무엇보다 우리 스승님(만타원 정도중 교무님)은 소태산 대종사가 주세 성자임을 천명하며 우리가 주세불 회상에 참여한다는 엄청난 공동체 유대를 확립시켜줬다. '어디에 처하든 어디에 있던지간에 주인으로 살아라! 주인되라'는 말씀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외연을 크게 넓히고 구례 지역사회에서 농촌 계몽의 결실을 거두었으며 초기 대종사께서 실행했던 영육쌍전의 모범을 그곳에 실행안착시켰다. 종교간 화합 축구대회를 유치하고 어려운 이웃을 살피고 도와주는 봉사·봉공의 기쁨을 알게 했다.

특히 우리에게 공부를 체계적으로 철저히 시켜 신심과 실천력이 함께하는 우리 법의 우수성과 의미를 감화력과 함께 하면 된다는 희망으로 교무님은 <정전>공부를, 교도회장은 <논어>와 <중용>을, 선배들은 영어와 수학을 후배들에게 가르켰다. 당시 시골 교당에 50~70명의 학생들이 득실댔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이 되고 학생이 선생이 되어 우리 모두는 적극 참여하여 명실상부 구례 사회의 중추 종교로 자리매김하였다. 학생 회장이었던 나는 방송국 인터뷰며 학교장 표창을 받았다. 원불교의 역동성, 미래의 희망을 보는 듯 학생회는 그렇게 무럭 무럭 성장했다.

/기간제 전무출신, 둥지골청소년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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