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연 원무/원불교서예협회

"서예는 마음을 그린 것이다."(書者心畵也)라는 말은 중국을 비롯한 서예문화권의 나라에서는 늘 애송되고 있으며, 이는 "서예는 곧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는 서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품까지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이 글씨를 쓰는 일은 단순히 문자를 전달하거나 의미를 표시하는 일이 아니라 글씨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비롯하여 사상·기질·심성·학식·지혜·수양심 등을 표현하는 예술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를 서예전문용어로 "필의(筆意)"라고 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역대서예가들은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수행을 겸했으며, 역으로 서예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즉 서예는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며, 종교와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늘 '마음공부'를 강조한다. 즉 마음공부를 하는 방편으로 서예공부가 가능하다는 말이 되기도 하며, 서예삼매경을 통한 정신수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화는 여러 선진님들의 법어에서 확인할 수 가 있다. 정산종사께서는 "명필이 되기로 하면 먼저 명필의 필법을 체받아서 필력을 잘 길러야 하듯이 부처를 이루기로 하면 먼저 부처님의 심법을 체받아 일일시시로 불심을 잘 길러야 하나니, 우리는 대종사의 심법을 큰 쳇줄 삼고 정전의 말씀대로 꾸준히 실행하여 대종사의 법통을 오롯히 이어 받는 참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니라."(〈정산종사법어〉 권도편23장)라고 하여 필력과 심력을 기르는 공부방법이 한 가지임을 강조했다. 또 대산종사도 스승과 표준에 대해 "큰 스승을 만나 큰 표준을 완전히 잡고 나가면 영생길이 환하게 개척된다. 그러니 참으로 큰일이다. 글씨를 쓸 때에도 명필을 만나 쳇줄을 잡고 나가면 바로 명필이 될 수 있으나 명필 아닌 글을 쳇줄로 하여 나가면 결국 그 체집을 벗어나지 못하여 졸필을 면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설사 큰 스승의 큰 표준을 얻고 명필의 쳇줄을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주견과 표준을 고집하거나 자기 체줄을 버리지 못하면 조롱박이 되고 졸필이 되고 만다. 또 그것으로 남을 지도하면 본인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여 죄를 짓게 된다. 조심할 일이다." (〈대산종사법어〉 신성편)라고 했다.

▲ 교단은 '원묵회서예대전'과 '원불교서예협회'를 통해 초대작가를 배출해왔다.
이상과 같이 우리 스승님들도 구도의 자세와 글씨 쓰는 일은 같은 일로 여겼다. 이는 곧 상없이 꾸준히 마음의 본래자리를 찾고자 하는 구도의 정신과 명필에 이르기 위해 꾸준히 명서첩을 따라 쉼없이 갈마해야 하는 서예의 정신성은 한가지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원불교는 '원묵회서예대전'과 '원불교서예협회'를 통해 많은 초대작가들을 탄생시키고 있으며, 서예법문작품의 묵향을 통한 교화에 앞장서고 있다. 앞으로는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법문 및 〈정전〉의 모필사경을 통해 정신수양과 마음공부를 완성하는 단계를 기대해 보며, 교법 전파를 위한 서예의 역할과 중요성이 더욱 인식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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