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과제 1순위, 선거법

▲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이 지난해 채용비리 최경환 공천반대 피켓을 들고 40분간 1인 시위를 한 혐의(선거법 위반)로 기소됐다. 사진=청년유니온
#1. 촛불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박근혜 국정농단에 책임 있는 정당에는 표를 주지 맙시다. 대선에서 꼭 심판합시다"라고 말하고 시민들이 환호와 박수로 호응한다.

#2. '사드 배치에 찬성하는 바른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맙시다'라는 유인물을 사드 배치 지역인 성주의 주민들에게 나눠준다.

#3. 대선 후보들의 사진을 붙인 길거리 게시판을 만든 뒤에, '국정농단 사건에 책임 있어서 대선에서 뜨거운 맛을 보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물으며 스티커 붙이기 이벤트를 한다.

#4. 촛불집회 참가자에게 '박근혜 국정농단 비호한 정치인 심판하자'는 손피켓이나 스티커를 나눠준다.


선거법 개혁에 161개 시민단체 연대

5월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위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즉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선관위에 단속되고 처벌 받게 될지도 모른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일 180일 이내에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표현을 금지하고 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토론은 더 치열해져야 함에도 한 발만 더 나아가려 한다면, 이내 선거법은 두려운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위와 같은 사례는 선거 때마다 계속 갱신돼왔다. 악의적인 왜곡이나 돈과 조직으로 선거결과를 좌지우지 하려는 것도 아니다. 후보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 정보를 나누고, 정책을 비교평가 하고, 투표합시다! 권유하는 것인데도 '위법, 불법행위'가 된다. 더 나은 정치를 꿈꾸는 유권자들의 참여가 왜 불법이 되어야 할까.

지난달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시민사회단체들은 선거법 개혁을 일순위 정치개혁 과제로 꼽았다. 선거법 개혁에 찬성하는 161개 시민단체들로 이뤄진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개혁 공동행동'은 3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전에 선거법부터 개정하라"고 정치권에 촉구했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이번 대선 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결선투표제 도입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만 18세 투표권 확대, 유권자 표현의 자유 보장 등의 개혁은 이뤄져야 한다"면서 "이게 촛불을 든 민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라고 주장했다.

박근용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은 "촛불시민혁명을 극찬했던 대선주자들이 유권자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채용비리 의원 공천 반대 피켓도 불법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20대 총선을 2개월여 앞둔 2016년 2월1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의원 공천반대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취업청탁 채용 비리', '청년 구직자의 노력을 비웃는 채용 비리 인사가 공천되어선 안 됩니다'라는 문구와 친박 실세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의원 얼굴 사진을 담은 피켓을 들었다. 1인 시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약 40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 많은 것을 바꿔 놨다. 얼마 뒤, 김민수 위원장은 영등포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그날의 1인 시위 이후, 최경환 의원이 모시던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돼, 결국 구속됐다. 김 위원장은 아직도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거리에서 40분 동안, 취업청탁 채용비리를 비판하며 공천을 반대한 게 그렇게 큰 죄일까?
▲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개혁 공동행동은 3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전에 선거법부터 개정하라고 정치권에 촉구했다.
공직선거법 90·93조 대표적 독소 조항

문제의 핵심은 공직선거법이다. 현행 선거법은 깨알 같은 조항으로 선거일 기준 180일 전부터 유권자가 누구(정당 포함)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가로막는다. 여러 잘못과 비리 의혹을 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해도, 어떤 후보자와 정당이 시민의 재산권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내세워도, 한국의 시민은 이를 자유롭게 비판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반대 사례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훌륭한 인물이 출마해도, 시민의 행복과 기본권 확대를 위한 정책을 내세운 후보자와 정당이 있어도, 유권자는 마음껏 지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은 공직선거법 제90조 제1항과 제93조 제1항이다. 물론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경우만을 금지하고 있지만, 현수막이나 피켓, 인쇄물에 '정당'이나 '후보자', '예비후보자'의 이름이나 사진이 들어가고, 일정한 구호나 문구가 들어가면 사실상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전면 금지'나 마찬가지다. 제90조 제1항에서는 아예 이러이러한 경우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는 간주 규정까지 두고 있다.  설치·게시·배부가 금지되는 것도 현수막이나 피켓뿐만이 아니다. 화환, 풍선, 간판, 애드벌룬, 선전탑, 인형, 마스코트,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 도화, 녹음·녹화테이프 등등, 온갖 것이 금지된다.

선관위 폐지 제안에 국회는 지지부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시 현행 공직선거법이 유권자의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법 개정 의견을 속속 내놓고 있다.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8월 국회에 정치관계법(공직선거법·정당법·정치자금법) 개정의견을 제출했다. 선관위는 ▷말과 전화를 이용한 선거운동 상시 허용 ▷일반 유권자도 선거운동기간 중에 소품이나 표시물을 입거나 지니고 선거운동 보장 ▷공직선거법 90조, 93조 폐지를 제안했다.

하지만 정작 국회의 법개정 움직임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상임위인 안전행정위에서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 정치발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이 난항을 겪는 이유를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현행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 정당의 유불리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 기존 국회의원들에게는 불리하기 때문에 법 개정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국정농단과 정경유착 세력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그 중심에 있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린 주역은 촛불 시민이었다. 그런데 유권자인 촛불 시민들에게 선거기간에는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고 종용하는 공직선거법은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적폐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고 한다. 모든 시민이 언제든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고 자신이 지지·반대하는 후보자에 대해서도 편하게 말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한국에서 그 꽃은 피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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