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공부

▲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배(復)안의 할아버지'라는 말 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항렬이 높아서 할아버지가 된다는 뜻이다. 항렬은 그가 한 조상에서 몇대 손인가를 구분하기 위한 척도다. 항렬이 높다하여 태중 아기의 존재 자체가 누구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다. 방편과 언어에 속아 본질을 놓치고 살면 높고 낮음을 가리느라 정신이 복잡하고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위쪽이 더 중요한가 옆이 더 중요한가. 응감을 받아야 좋은가 하감을 받아야 좋은가. 부모가 중요한가 형제가 중요한가.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사은 중에 더 중한 것이 따로 있어 하감과 응감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항렬을 나눠 표현을 달리 해본 언어적 묘미일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언어와 이름과 역할이 필요불가결하다. 하감과 응감은 이름과 언어다. 이름을 붙이고, 역할을 정한다 해서 그 절대적 평등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부적으로 이름과 위치는 각양각색이어도 우주만물 허공법계 그 어느 하나 더 중하거나 더 가볍거나 하찮지 않다.

사생일신! 일체가 내 몸, 법신뿐인데, 내 몸 어디를 더 중하고 어디를 더 경하다 구분할 수 있는가. 사은, 우주만물은 각각의 역할, 에너지 체계가 다른 것이지, 높고 낮음도 귀하고 천함도 없이 평등한 한몸이다. 분별없는 자리에서 보면 다 하나며, 분별있는 자리에서 보면 기능이 천차만별이고 이름과 역할은 무량한 묘유다.

원이란 출발점도 없고 끝도 없고 앞뒤도 없고 위아래도 없다. 절대적인 시작점은 따로 없다. 절대적으로 시작하는 곳, 중심되는 곳이 있어야 절대적인 높고 낮음이 설정될 수 있다. 몸의 시작점도, 우주의 시작점도 따로 있지 않다. 시작하는 곳이 없으니 일체만물이 다 중심이 된다. 어디가 더 높거나 중한 곳이 없다. 지구본 속의 지도는 거꾸로 놓아도 옆으로 놓아도 다 옳다. 중심과 가치와 경중을 설정하는 것은 작위적인 것이다.

일체의 언어와 현상의 나타남에서 그 본질적으로 둘이 아님을 여여히 볼 수 있어야 차별없는 참 불공이 이뤄진다. 체를 떠나지 않고 용을 보면 평등한 가운데 차별없이 응할 수 있다. 언어 이전의 자리에서 언어를 읽어야 어긋남 없이 본의가 훤히 드러난다. 모르면 언어와 위치와 역할따라 차별이 일어나고 억지스런 불공, 불공하는 척하는 신앙만 한다. 언어와 이름에 속아 살면 일체가 시끄럽고, 일원을 떠나지 않고 온갖 현상을 바라보면 일체가 기적이며 은혜이며 한몸의 움직임으로 보여진다.

언어에 속고 머리로만 아는 진리는 아무 힘이 없다. 경중을 따지고 뭣이 중한가에 이끌린다. 진리를 진실로 알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공부를 하는 이는 그 어떤 것이어도 더 하찮거나 더 위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전상 누구를 어떤 자리에 앉힐 수는 있어도 이름과 지위와 역할을 보고 누구 앞에서 더 거만해지거나 더 위축되지 않는다. '감히 누구 앞에서' 마음속에 이런 언어와 감정이 출렁이거들랑 당장 알아차릴 일이다. 진리를 털끝만큼도 모르거나 알아도 아직 힘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터이다. 온 우주가 나 뿐이거늘 더 교만할 것도 괜히 위축될 것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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