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배운 게 이것밖에 없는데 다음 생에도 해야지'

옛말에 무욕즉강(無欲卽剛)이라 했다. 욕심이 없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뜻이다. 출가했던 초발심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며 평생을 정남(貞男)으로 일관한 홍산 이성규(73·弘山 李聖奎) 원로교무.

"우리는 출가심을 잃지 말아야 해! 돈을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명예 구하러 온 것도 아니니. 교화하고 봉공하고 제중하러 왔기 때문에 언제나 초발심을 반조해야지."
중앙남자원로수도원에서 만난 그는 여유 있으면서도 사뭇 진지하게 출가인의 삶이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소년의 출가이야기

경상남도 통영시 고성군이 고향이었던 그는 어릴 적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목사를 해볼까 하다가 부모가 싫어해 성경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리기도 했다. 그가 원불교를 만난 것은 통영수산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입학식 하러 가는 길인데 언덕 높은 곳에 원불교 통영지부라고 있어. 그래서 저것이 무엇인가 했지. 원불교란 이름이 붙어있는데 불교인가 싶었어. 찾아가보니 사람이 안 보였어."

그는 신경쓰였다. 산중에 어느 스님이 시내 볼일 보러 와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집인지, 불교라면 어느 종파에서 세운 것인지 말이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친구의 안내로 비로소 원불교에 대한 의심이 해소됐다.
"내가 학생회장 할 때였는데, 가보니까 학생들이 한 50명 앉아있어. 그때 내 환영식 한다고 찐빵잔치를 벌이더니 소감이 어떻냐고 물어. 그래서 저 여자선생님처럼 이런 생활도 괜찮겠다고 했지. 그런데 이 이야기를 친구가 교무님에게 했나봐."

당시 통영교당에는 금타원 박세경 교무가 주임으로 있었다. 3학년 올라갈 무렵에 집과 학교가 너무 멀다보ㅋ니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통영교당 별채에 하숙을 하게 됐다.
"어느 날 교무님이 전무출신하면 어떻겠냐고 하셔. 전라도에 있는 원광대학교가 있는데 거기는 학비도 면제해주고 하니까 거기서 공부하고 전무출신하면 어떻겠냐고 그러시는 거여. 귀가 솔깃했지."

그러나 부모님은 반대했다. 입학시험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등록금 마련할 길이 없어 군대를 가버렸다. 하지만 휴가 나올 때면 교당부터 먼저 찾았다. 제대 후 직장 잡아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다음 사표를 냈다. 모아둔 돈으로 이불 만들고 옷을 샀다. 총부로 들어오기 전 부모님께는 '저 갑니다'는 말씀만 드리고 바로 나와버렸다.

신념 이뤄 주는 기도

원불교학과를 다니다가 방학이 되니 서면교당으로 발령받은 추천교무를 찾았다.
"교무님이 '인제 전무출신 했으니까 집에 가서 인사 드려야지' 하시는 거여."

교무님 말씀대로 집에 인사드리러 가니 어머니는 아들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아버지는 "뭐하러 왔냐" 하고 언성을 높였다. 차려주는 밥만 먹고 아침 첫차 타고 집을 나와버렸다.
"이러면 안되겠구나 하면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방학이 끝나갈 무렵부터 한 학기동안 '우리 부모님이 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하고 성탑기도를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았다. 그러다가 이제는 혼나더라도 부모님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일어났다. 다시 인사드리러 가니 마을 주변 사람들이나 부모님은 예전과 다르게 맞았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도를 하면 신념이 이뤄진다는 진리를 그때 알았지. 주변을 원망하기 전에 내 스스로 해결하고 진리 전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야."

공익부와 인연

그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공익부 소속 원광한의원이었다.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이정재를 희사한 집이라 해서 처음 이름이 동화병원으로 양방을 운영했지만 폐업했다가 나중에 원광한의원으로 다시 개업한 곳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가 원광한의원을 익산시에 고발한 것이다.

"원래 이름이 원광한의원인데 거기 근무하던 과장이 '원광대학교 부속 한의원'으로 간판을 걸어놓은 거여. 당시 대학병원이라고 하면 알아줬으니까 의사들이 명예심에 간판을 그렇게 만든 것이지. 신고됐다고 사람들이 나오니까 얼릉 간판 떼서 물리치료실에 감췄는데 걸렸지. 다행히 감사관 책임자 중에 교도가 있어서 잘 마무리 되긴 했어."

공익부 소속으로 원광한의원에서 3년 살다가 추천교무인 박세경 교무가 있는 서면교당으로 이동했다. 총부에서 붙잡았지만 지금 이 나이에 교화계에 또 추천교무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2년 살고 나니 추천교무님은 새로 낸 금정교당으로 발령받았고, 혜타원 오희원 공익부장이 총부로 그를 다시 불렀다.

당시 공익부 자체가 어려울 때였다. 아픈 전무출신 환자들은 늘어났지만 수술할 돈도 부족했고, 혜택 받을 만한 병원도 없었다. 그때 공익부 간사였던 이성구 교무가 교학과 시절 여름방학에 음성 꽃동네 실습을 다녀왔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매달 천원을 모금하는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 이것이 돈이 될까 했는데 시작하고 보니 꽤 많은 돈이 들어왔어. 환자들 입원비 내주고도 여유가 있게 되더라고. 전국적으로도 의료보험이 확대되는 시기가 겹쳐서 전무출신들 병원비가 많이 절약됐고, 원광대병원도 혜택이 되니까 환자 진료도 수월했지."

당시 전무출신 용금은 총부기준으로 만오천 원 정도였다. 천원 모금이 시작되면서 전무출신 요양에 관해서는 공익부가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현재 중앙남자원로수도원이 당시 여자요양원 자리였다. 남자요양원은 현재 그 밑에 위치한 기와로 된 남자원로원 자리다. 요양원이 열악하고 방도 얼마되지 않아 수술을 받고서도 오래 쉴 수 없었다.

"그 당시에 편찮으신 분들이 많았어. 하지만 요양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며칠간 쉬다가 교당 가서 치료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그는 전무출신 했으니 다시 교화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법무실장이었던 장산 황직평 교무가 추천한 양정교당을 시작으로 동마산교당, 금정교당, 진영교당을 두루 거치며 교화자의 삶을 지냈다.

물처럼 바람처럼

"그동안 살아오면서 힘들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금타원님 만나 전무출신하라는 말씀에 아무런 부담없이 출가한 것이나, 장산종사께서 '정남해야지'하신 말씀에 당연한 것처럼 '그래야지요' 하면서 약속한 것이나."

전무출신한다고 하니 어머니는 '니 갈 길 가는 것 같다'며 호응해주었고, 막상 정남한다고 서원 세울 때에도 중산 정광훈(中山 丁光薰) 대봉도가 '정남 하나 생겼다'며 중국집에서 짬뽕을 사주던 시절이 어제만 같다. 동산 이병은(東山 李炳恩) 종사는 그가 인사하러 올 때마다 '붓글씨 써주세요'라고 하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빼어난 붓글씨로 보감 삼을 만한 법문을 써주며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모두 다 인연따라 흘러가는 것이지. 전무출신하면서 크게 굴곡이 없었어. 부모님께 불공해야지 하고 드렸던 어린시절 기도의 힘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같아."
요즘에는 일상생활에서 육근을 잘 부려쓰는 공부에 매진 중이다.

"공부가 멀리 있는 게 아냐.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일원상 법어처럼 일상에서 육근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도인이지. 말 한마디할 때에도 멈춰서 남에게 마음 안 아프게 하는지, 내 행동 하나하나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되어가는지 살피는 게 생활표준이거든."

수도원에서 지키는 일과 하나하나가 이제는 더없이 소중해졌다. 이것이 생활 속에 적공이고 심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것이 뭐냐고? 좌선하고, 기도하고, 일심으로 보은봉공하는 것이지. 평생 배운 게 이것밖에 없는데 다음 생에도 전무출신 해야지."

털털한 그의 웃음 속에는 은은한 해탈이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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