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서울지역 일등 교화연원자

원불교 초기교단사에 여성제자들의 활약은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조직적, 적극적인 활동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와룡산훈련원 박성은 교무는 여성 10대 제자 중 삼대 여걸로 일컬어지는 삼타원 최도화 대봉도가 초기교단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소태산은 최도화 선진을 만나는 순간 회상 창립의 일에 한숨을 놓았다"며 "정산종사에게 '만나야 할 사람이다'고 전한 일화는 최도화 선진이 초기교단사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고 말했다.

최도화 선진은 원기7년 정월 만덕산 미륵사에서 정산종사를 만나고 생불님으로 받들고 따랐다. 원기8년 2월~4월, 원기9년 5월부터 한 달간 소태산이 진안 만덕산에 머무르며 선을 날 때, 진안지방의 많은 인재들을 인도했는데 박사시화, 이동진화, 이공주를 비롯한 서울 인연들이 새 회상에 불연을 맺도록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원기19년에는 진안순교, 원기20년에는 전주순교, 원기21년에는 마령순교, 원기31년부터는 좌포 주무를 역임하며 교단 1대 안에 319명을 입교시켰는데 그 인연들은 교단창립의 핵심인연들이 되었다.

그는 "최도화 선진이 봉래정사에서 처음 소태산을 뵙고 인사드리니 소태산은 '자네로 인해 도(道)의 꽃이 활짝 필 것이다'며,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내렸다"는 일화를 밝히며, "정산종사는 최도화 선진을 '전북 회상과 서울 회상의 총 연원'이라 했다"고 덧붙였다. 초기교단사에서 최도화 선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도화 선진은 전주 최씨로 부친 최성명과 모친 정만옥 사이의 장녀로 1883년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금평에서 출생했다. 집안이 부유했으나 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빈곤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달했던 최도화 선진은 낮에는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면서도 밤이면 어머니가 읽어주는 소설책 듣기를 좋아했고, 한글도 익혔다. 이를 계기로 최도화 선진은 고대소설인 '소대성전(蘇大成傳)' 내용처럼 도인을 만나 도통할 것을 가슴에 품게 된다. 이후 도인 만나기를 염원하며 절에 시주를 많이 하며 기도를 올리거나, 실제 불가로 출가해 적공도 하고, 동학사에서 용맹정진도 하게 된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이 없자 하산을 결심하고 고향에 돌아온 최도화 선진은 비단장사를 시작한다.

비단장사를 시작한 최도화 선진은 보따리상으로 전주, 완주, 진안, 임실, 장수, 남원 일대를 돌다가,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증산교를 만나 다시 수련에 전념하지만 이내 단념하고 본업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정산종사는 '전주는 들르지 마라'는 소태산의 명을 받아 우연히 머무르게 된 곳이 만덕산 미륵사였는데, 당시 미륵사 화주였던 최도화 선진을 만나게 된다. 정산종사를 생불님으로 모시며 극진히 모셨던 최도화 선진은 어느 날 말없이 떠난 정산종사를 찾아 봉래정사로 향한다. 봉래정사에서 소태산을 만난 최도화 선진은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되며, 각지에 교당을 설립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불우한 여성들을 돕고 교화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박 교무는 "최도화 선진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불공을 하며 교화했다"며 "비단장수와 방물장수로 다져진 생활력과 사람을 대하는 친화력, 절 화주로서 경험과 불법에 대한 신심으로 교화하는 탁월함은 원기10년대 전북 진안과 마령 일대 수많은 인연들을 입교시켰으며, 특히 마령출장소에서 교화활동을 펼치던 때 중앙총부에서 교화상황을 살피러 온 삼산 종사는 이러한 활동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발표했다. 최도화 선진이 인도한 인연 중에는 박사시화, 전삼삼, 노덕송옥, 이청춘, 성성원, 최내선, 박혜련화, 오종태, 오종순 등이 있는데 대부분 창립 유공인들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 2차적으로 교단과 인연이 맺은 인물들 역시 초기교단의 발전과 교세확장의 주역들이 된다.

원기39년 11월4일 72세로 이리자택에서 열반하기까지 교단을 위해 물심양면 정성을 다했던 최도화 선진은 대호법위에 추존되었고 희사위에 올랐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