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일원상의 진리는 원불교 교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는 소태산의 깨달음에 의해 확립된 진리적 언설이다. 그것의 진리구조를 운운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확인해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전에 등장한 깨달음의 언설을 통해 그 공통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수행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단, 그 언어의 너머를 보는 자에게만.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이 진리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 적절한 말이 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선불교의 깨달음의 구조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송대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가 "30년 전에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니 그냥 산이었고 물을 보니 그냥 물이었다. 선지식을 만나 수행을 하고, 산을 보니 그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니 그 물이 아니었다. 지금 마음 쉴 곳을 얻어, 다시 그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로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어(禪語)의 유래가 된 내용이다. 그것은 세 단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지금 내가 보는 산은 문자 그대로 산이자 물이다. 여기서 물과 산은 세계의 모든 존재를 뜻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분별하는 마음이 낸 차별화된 세상이다.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는 지금 이 세상이다.

둘째는 우리의 의식이 180도 전환되어 보는 세계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완전 무차별한 세계를 말한다. 자,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영원히 존속될 그 무엇을 자신의 안에 간직하고 있는가. 세월이 가고, 또 가도 영원히 변치 않을 그 무엇을 자신의 안에 간직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무아이다. 무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我)는 서로 의존해 있는 연기의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완전한 공(空)의 세계로 환원할 수 있다. 이것이 어렵다면, 죽음을 생각해보라. 죽음은 현세의 모든 존재가 가진 지위, 권세, 소유, 형상을 무화시킨다. 죽음은 마침내 우리 존재를 완전한 평등으로 이끈다. 진공은 이처럼 완전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진공의 세계로부터 다시 180도 회전한 의식의 세계이다. 원점이다. 그런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럼 처음의 산과 물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존재의 절대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제 옛날의 그 산이 아니고, 옛날의 그 물인 아니 것이다. 지금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깨달음의 분상에서는 모든 존재가 부처로 현현한 최상 최고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존재가 있는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존재 또한 각자의 불성을 가지고 자신을 뽐내고 있다. 나뭇잎 하나하나, 꽃송이 하나하나 모두는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존재도 순간순간 절대의 그 위치와 그 시간을 점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들이 모인 이곳이 불국토가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그것이 묘유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이렇게 체험의 영역에서 분석해 들여다보았다. 이제 자신의 언어로 말할 차례다. 말해보라. 그 대신 앞의 말들은 죄다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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