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금산사 미륵전에는 미륵부처가 있다. 3층 높이의 장신으로 그냥 우뚝 서 있다. 미륵부처 앞에 불단이 있다. 불단에 삼배하고 그 옆의 통로를 통해 미륵의 발 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통로를 통해 미륵의 발을 만져보기 위해 가보면, 거대한 가마솥 위에 미륵부처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솥 위에 서 있는 미륵부처, 숨이 콱 막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긴 시간이 흘러 다시 금산사에 갔다가 미륵이 솥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솥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솥은 미륵의 자궁이었다.

〈주역〉 50괘 화풍정(火風鼎)의 첫문장은 '정원길형(鼎元吉亨)'이다. 해석하자면, "솥은 크게 길하여 형하느니라"가 된다. 이 때의 형(亨)이란 '형통하다'가 아니라 '삶고 익히다'에 가깝다. 왕필은 '형'을 '팽(烹)'으로 해석했다. 왕필의 주석을 보면, 소태산이 어찌하여 '솥'이고 전법(傳法)을 할 제자에게 '정(鼎)'이란 법호를 내렸는지 보다 명확해진다. "혁은 옛 것을 버리는 것이요, 정은 새 것을 취하는 것이다. 새 것을 취하여 그 사람에 맞게 하고, 옛 것을 바꾸어 법제가 정돈되고 밝아진다. … 정이라는 것은 변화를 완성하는 괘이다. … 삶는 것은 솥이 하는 일이다.

혁은 옛 것을 버리고 정은 새 것을 이루므로, 삶아 익히고 맛을 내는 그릇이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데 성현이 없어서는 안 된다. … 성인은 그를 써서 위로는 상제를 제향하고 아래로는 크게 삶아서 성현은 기른다."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주역 왕필주〉, 도서출판 길, 2006년, 383~384쪽)

원불교는 혁의 종교가 아니고 정의 종교이다. 후천개벽과 동학의 옛 것에서 정신개벽의 새 것을 지향하여 탄생한 종교인 것이다. 소태산은 솥에서 난 성자며 '솥의 사람'이다. 정은 새 것을 완성한다. 이것이 바로 개벽이다. 끊임없이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완성하는 것이 개벽이라고 소태산은 가르침을 주었다. 여기서 옛 것이란 물질의 노예로 사는 것을 말하고 새 것이란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 정신이 개벽되어 사는 것을 말한다. 금산사 미륵부처는 솥에서 태어났다. 소태산도 솥에서 태어났다.

소태산은 익산 총부를 미륵산의 서쪽에 정하였다.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 미륵의 서쪽이란 '성불제중과 제생의세'가 이뤄지는 곳이다. '내가 성불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세상'이 바로 미륵의 서쪽인 것이다. 소태산은 바로 그 곳, 미륵의 서쪽에서 온 성자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륵의 서쪽은 우주와 만물을 위한 솥이 걸린 곳이며 법신불사은이 있는 곳이다.

원불교 정신의 핵심은 정이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원불교의 가치와 철학이 집약된 소태산 사상의 거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전에 세워놓은 소태산의 가치와 철학은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소태산 사상의 거처는 허물어져 잡풀만 무성한데 새로 짓고자 하는 집들은 그저 번듯하기만 하다.

대각개교절을 맞이하여 우리 원불교는 과연 정의 종교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래서 날마다 개벽하고 있는지 깊은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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