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문화순례

▲ 변산원광선원의 전경. 현재 변산원광선원은 재가출가 교도들의 훈련도량으로 운영돼 주로 성지를 찾는 교도들의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변산원광선원

월명암 주지로 있던 정도전 스님 때의 이야기다.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해 인근 부락에 암자 하나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하며, 문수보살에게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짓고 문수암이라 이름 지었다.

그런데 도전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에게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시요" 했더니 문수암을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이라 하면 좋겠다"며 지선스님이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게 되는데, 원기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돼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변산원광선원'이 됐다. 원기77년에는 수양원에서 훈련원으로 개정, 지금은 '변산원광선원'으로 재가출가 교도들의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복원 및 관리에 특별한 진척이 없었는데, 변산원광선원을 바탕으로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정산종사 추모탑이 조성돼 있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성탑으로 원기73년 11월 대종사탄생100주년 성업봉찬사업회가 총부 대종사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했다. 또한 대각전도 원기97년 다시 신축해 11월에 봉불식을 가졌다.
▲ 원기4년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월명암에 보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지내게 했다.
월명암

월명암은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쌍선봉 아래에 있는 사찰로 선운사의 말사다. 서기691년 불교 3대 거사 중 한 명인 부설거사(浮雪居士)에 의해 신라 신문왕 때 창건됐다. 암자의 이름은 부설거사의의 딸 월명(月明)이 수도하던 곳이라 하여 '월명암' 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선조 때 진묵스님이 주석해 선도량 사찰로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1863년(철종 14) 성암스님이 중건했고, 1908년에 소실 된 것을 1915년 학명선사가 중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돼 1956년에 원경스님이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종사는 봉래정사에 머물 때 당시 주지인 백학명 선사와 만나 교우를 가졌다. 원기4년(1919) 7월에 혈인기도가 끝나자 정산종사를 월명암에 보내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있게 한 암자이다. 정산종사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종사를 가까이 모시고 싶은 마음에 3km 떨어진 석두암까지 내려가 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새벽에 다시 올라왔다. 후인들은 봉래정사와 월명암 사이로 난 길을 정산로(鼎山路)라 부르고 있다.

월명암이 위치한 쌍선봉은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혈인기도 회향처로 알려져 있다.

봉래구곡

직소폭포의 높이는 약 30m로 중계계곡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직소폭포는 둥근 소(沼)를 만들며 떨어지는데, 폭포가 갖추어야 할 산세, 절벽, 계곡, 소 등의 필수적인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 폭포로 꼽히며 둥근 소의 이름은 실상용추(實相龍湫)라 칭한다. 폭포를 받치고 있는 실상용추는 지름이 50m 이며, 깊이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深淵)을 이루고 있다.

직소폭포를 흐른 물이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꺾이고 감돌아 펑퍼짐한 반석 위로 흐르는 단조로운 물줄기를 이루었고, 은반에 옥이 구르듯 몇 굽이 감돌아 반석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머무는 듯 넘나드는 이곳이 바로 봉래구곡(蓬來九曲)이다.

봉래구곡 사진 봉래구곡은 제1곡 대소(大沼)에서 제9곡 암지(暗池)까지 서로 다른 이름과 경치가 있는 아홉 개의 명승(1곡 대소(大沼), 2곡 직소폭포, 3곡 분옥담 (墳玉潭), 4곡 선녀탕(仙女湯), 5곡 봉래곡(蓬來曲), 6곡 금강소(金剛沼), 7곡 영지(影池), 8곡 백천(百川), 9곡 암지(暗池)을 말한 것이다.

현재의 봉래구곡이라 불리는 곳은 원래의 제5곡인 봉래곡(蓬來曲)이 9곡 중 가장 중심지인 관계로 어느 때부터인지 9곡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봉래구곡이 돼버린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주석하던 봉래정사에서 실상사를 지나 직소폭포로 가는 길을 500m 남짓 가면 변산 제일의 풍광인 봉래구곡이라는 계곡이 나온다. 소태산은 이곳을 '변산구곡'이라고 했다. 새로운 왕국 건설을 꿈꾸던 이성계가 팔도강산을 돌며 기도할 때 청림리 어수대에서 물을 길어와 봉래구곡에서 천황봉을 향하여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다. 널찍한 바위에 '봉래구곡 소금강(蓬萊九曲小金剛)'이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바위 두 개가 올연하게 서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는 시구를 읊었다.
"변산 아홉 골짜기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으며 없다는 것도 또한 없으며, 아니고 아니며 아니다는 것도 또한 아니다."

이 시는 '회보' 제31호 법설 '무상대도(無上大道)'에 발표되었으며, <대종경> 성리품 11장에 수록되었다. 이 시구는 원기5년~6년(1920~1921)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소태산은 이 무비송(無非頌)을 읊은 이후 실상초당 기슭의 거북바위 옆에 석두암(石頭菴)을 짓고 주석하며 스스로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했다.
▲ 변산 앞바다에서 바라본 하섬의 모습. 물때를 잘 맞추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하섬

하섬은 부안 변산반도의 서북 내해에 위치해 있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의 서단 노령산맥이 끝나는 곳으로 행정구역은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며, 서북내해에 위치한 원불교 유일의 해상훈련원이 있는 곳이다. 총면적 약 115,702㎡의 섬으로 그 중 경작지인 밭이 15,206㎡이며, 원기54년(1969) 원불교에 귀속됐다.

이 섬은 처음에 새우같이 생겼다 해서 하섬(蝦島)이라 이름 불리우다가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해제기도 마치시고 하섬을 바라보며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한 이후, 연꽃을 의미하는 하섬(荷島)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섬은 육지에서 1km쯤 떨어져 있고 변산 해수욕장과는 직선거리로 8km 쯤 떨어져 있다. 이 섬에서 주위를 한바퀴 도는 데 약 30분가량 소요된다.

하섬은 조선 말엽까지만 해도 주인이 없는 섬으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잠깐 쉬며 물을 긷는 섬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 부안에 사는 신씨의 소유가 됐는데, 부안교당 정양진교무가 원기39년(1954) 사들였으나 하섬을 개간한 사람들과의 경작권 관계로 이후 15년 만에 교단에 귀속됐다. 원기46년에는 대산종사가 하섬에 정양하며 <교전대의>(敎典大義)를 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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