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정확히 이십여 년 전, 지리산 실상사의 약수암에서 가을을 난 적이 있었다. 연꽃을 그리는 스님과 단 둘이 지냈는데, 내가 공양주보살 격이었다. 두 사람의 끼니였는데도 여간 성이 가시는 게 아니었다. 사나흘에 한 번은 산을 내려가 인월장이나 마천장에서 장을 봐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단식을 시작했다. 스님은 관장을 하고 창자를 모두 비워낸 뒤에 소금물만 먹으며 열흘 정도 곡기를 끊고 명상에 전념했었다. 혼자 음식을 끓여먹기가 민망해 나도 덩달아 곡기를 끊게 되었다.
단식에는 '나를 위한 비워내기'와 '너를 위한 비워내기'가 있다. 위의 경우는 '나를 위한 비워내기'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에 살이 찌고 문득 삶이 지리멸렬해질 때, 소화기관에 쌓여 있는 생의 찌꺼기를 배출하기 위해 단식을 결행한다. '나를 위한 비워내기'는 익히 알려진 프로그램에 따라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단식 전과 단식 중 그리고 단식 후에 이르기까지 열흘 정도 곡기를 끊고 다시 섭취하는 과정이 바로 '나를 위한 비워내기'인 것이다. 나를 비워내고 나를 채우기 위해서 잠시 곡기를 끊어보는 방편으로 이러한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를 위한 비워내기'를 실상사에 있을 때 딱 한 번 해봤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잠시 영어(囹圄)의 몸이었을 때는 투쟁으로 단식을 선택하기도 했었다. 이 때의 단식이 '너를 위한 비워내기'에 속한다. 세계는 나와 너로 구성되어 있다. '나 아닌 모든 것'이 '너'다. '너'가 아플 때 세계도 아프다. '너'가 상처 받으면 세계도 상처받는다. 세계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세계가 상처 받으면 나도 상처 받는다.

'너를 위한 비워내기'에는 프로그램이 없다. 그냥 굶는다. 끝나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기약 없이 굶기만 할 뿐이다. 광화문에서 유민이 아빠가 길고 긴 단식으로 생명이 위독해져 갈 때,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참모 한 사람을 서둘러 만나자고 했다. 저녁을 사주면서 '유민이 아빠를 살리기 위해 문대표가 그 곁에 가서 말없이 굶어야 한다'고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문재인 대표가 유민이 아빠 곁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나도 그 날부터 일주일 동안 동조단식을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광화문에 앉아서 단식을 한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하면서 굶었다.

성주 성지에 사드가 배치되었다. 미군은 한국을 지키고, 한국 경찰은 미군을 지키는 이상한 관계 속에서 그들은 깊은 새벽에 침략처럼 성지를 유린하였다. 한국 경찰이 제 나라 국민의 주권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이, 미군은 낄낄거리며 사드를 배치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교무들이 맨 먼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사드가 그렇게 반주권적으로 배치되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사드 철거'는 곧 '너를 위한' 일이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뭇 생명들의 평화와 안전한 일상을 위하여 교무들이 곡기를 끊은 것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무기한 단식을 알리는 행사의 말석에서 100배를 하면서, 나는 그 절을 단식을 시작하는 교무들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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