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가짜 몸과 마음을 참인것으로 알아 고해에 매인다

본래 갖춰진 지혜를 밝히면 부처를 이룬다



佛言 - 夫爲道者는 譬如持炬火入冥室中하면 其冥卽滅하고 而明猶存인듯하야 學道見諦하면 愚癡都滅하야 得無不見하리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대저 도를 닦는 것은 비컨대 횃불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그 어둠이 곧 없어지고 밝은 것만 있게 되는 것 같아서 도를 배워 진리를 알고 보면 무명 번뇌가 자연히 소멸되어 밝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사십이장경〉 17장의 말씀은 도를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마치 횃불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어둠은 소멸되고 밝음만 남는 것과 같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일체의 모든 고통의 근원인 무명이 소멸되고 늘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지거(持炬)는 '횃불을 가지다'라는 의미로 내가 공부하여 진리의 소식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명실(冥室)은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로 무명의 업장에 쌓여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학도견제(學道見諦)에서 제(諦)는 변치 않는 진리로 진속이제(眞俗二諦) 중에서 절대불멸의 진리인 진제를 의미한다. 즉, 도를 배워 변치 않은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들은 천진 성품을 지키지 못하고 탐진치의 욕심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살았듯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게 다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다. 또한, 생명이 유한한 육신을 참 나로 생각하고, 희노애락에 매달려 탐·진·치의 욕심에 허덕이는 마음을 자기의 참 마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가짜 몸과 가짜 마음을 참 몸과 참 마음으로 삼고 살고 있으니 당연히 고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일로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참 몸과 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가짜 몸, 가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잘 살펴보면 현재 느끼는 그 고통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을 밝히는 '밝음'은 모두 같을까? 사람마다 공부한 것과 깨달은 것에 대비해서 그 밝기가 다르다. 그래서 대산종사는 자신의 빛의 밝기가 호롱불 정도인지 아니면 손전등 정도인지 아니면 전등불 같은 밝기인지, 또한 자기의 가정은 비출 수 있을 정도 인지, 이웃집까지 비출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님의 밝은 빛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삼천년 전 인도에서 비춘 빛이 오늘날 여기까지 비쳐지고 있으며 성현의 빛은 태양과 같이 밝다고 했다.

"대종사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현은 천하 인류뿐만 아니라 전 생령에게까지 빛을 비춰 주신다. 그래서 욕심많은 사람들의 어둔 마음을 밝혀 주신다. 태양은 우리의 마음까지 비춰 줄 수는 없으나 부처님이나 대종사님은 마음까지 비춰 주신다. 교도님들은 뜨거운 불빛을 받아 보셨는가? 그 불빛 받아 보야 한다. 그 불빛만 들어가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대산종사법문집〉 3집 수행편 95. 나의 촉수)

참 몸과 참 마음을 깨치게 되면 횃불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무명번뇌는 없어지고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간사시절에 비닐하우스를 청소하면서 벽상에 걸린 글을 외우곤 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대산종사의 한시가 있다.

千年古寺一燈明(천년고사일등명) 천년 옛 절에 한 등이 밝으니
老僧閑坐聽水聲(노승한좌청수성) 노승이 한가로이 앉아 물소리를 듣더라.
魔空法空空亦空(마공법공공역공) 마도 공하고 법도 공하고 공 또한 공하였으니
心淸境淸夢寐淸(심청경청몽매청) 마음도 맑고 경계도 맑고 꿈 또한 맑도다.

천년된 옛 절에 한 등이 밝았다는 의미는 너무나 오래되어 사람이 살지 않아 인기척이 없는 절, 밤에 불이 켜질 일이 없이 어둡고 퀘퀘한 오래된 절에 갑자기 어둠을 밝히는 한 등이 켜졌다는 것은 절의 주인공이 많은 생을 통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깨달음은 노소도 없고 기약도 없으며 오직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노승이 한가로이 앉아 물소리를 듣는 다는 것은 수많은 생을 깨닫기 위해 수행했던 수도인이 마지막 한 관문을 넘어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니 그 동안의 분주하고 바빴던 마음이 모두 쉬어지고 자연과 합일한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생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은 노승에게는 이제 물리쳐야 할 마(魔)도 없고, 꼭 해야만 하는 법(法)도 없으며, 그 마와 법을 수고롭게 구분해야 하는 분별심도 없고 그 없다는 것도 없다. 이렇게 텅비어 착심이랄 것도 없이 공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니 마음도 시끄러울 일이 없고 나를 끌어가려는 경계도 없어서 꿈속조차도 맑고 맑아서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를 얻었다는 의미의 싯구이다.

누구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를 밝히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정성스럽게 나를 밝혀 온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빛을 발하는 성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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