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과 몸을 닦고 두 손을 모읍니다'는 노랫말에는 진리불공의 네 가지 핵심 포인트를 함축해 놓았다.
부처 되는 것과 부처 모시는 일…결국 하나라는 깨달음

심신재계, 일심정성 등 진리불공 핵심 가사에 담아내


135장) 고요한 법당
백인혁 작사 / 송관은 작곡

1. 고요한 법당 둥그신 임이시여
마음과 몸을 닦고 두 손을 모읍니다
사무친 서원 일념 촛불이 되어
영겁을 하루같이 살으오리다

2. 온누리 가득한 둥그신 임이시여
믿음과 정진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고요하고 밝은 마음 샘물이 되어
영겁을 하루같이 살으오리다


두 손을 모읍니다.

〈성가〉 135장 고요한 법당은 백인혁 교무가 작사한 노래이다. 백인혁 교무는 완도소남훈련원으로 첫 교무 발령을 받아 아름다운 자연과 조용한 시간이 주어져 선(禪)에 용맹정진하게 된다. 어느덧 다리 아픈 줄도 모르게 오랜 시간 좌선에 적공하게 되었고, 붓글씨를 쓴다든지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 등 활선을 하게 되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일심삼매 상태가 깊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법당에서 기도문과 주송을 읊으며 서원일념의 기도삼매에 흠뻑 몰입하는 낙도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백인혁 교무는 일심삼매와 기도삼매를 계속 이어오면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과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다 하나로 상통된다는 자각이 깊어지게 된다. 이 서원과 일심 공부로 전무출신 생활을 일관하게 된다. 성가 135장의 노랫말은 이러한 일련의 감각감상인 것이다.

〈성가〉 135장 고요한 법당은 법당에 모셔 있고 온누리에 가득한 '둥그신 임'에게 두 손을 모으는 진리불공을 표현하고 있다. '둥그신 임'은 법신불 일원상으로, 이 일원상은 법당에도 모셔져 있고 내 마음에도 모셔져 있고 우주 전체에 가득찬 진리로, 작사가 백인혁 교무는 이를 '둥그신 임'으로 모시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김영신 교무의 불공법에 대한 질문에 실지불공 뿐만 아니라 진리불공을 제시해 주며, 이어진 진리불공의 방법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답을 준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법신불을 향하여 각기 소원을 세운 후 일체 사념을 제거하고, 선정(禪定)에 들든지 또는 염불과 송경을 하든지 혹은 주문 등을 외워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면 결국 소원을 이루는 동시에 큰 위력이 나타나 악도 중생을 제도할 능력과 백천 사마라도 귀순시킬 능력까지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기로 하면 일백 골절이 다 힘이 쓰이고 일천 정성이 다 사무쳐야 되나니라."(〈대종경〉 교의품 16장)

결국 진리불공의 방법은 심신재계와 소원 세우기와 사념제거 그리고 일심정성의 4가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진리의 다른 이름이 법신불이므로 진리불공은 형상없는 허공법계를 통해 법신불에 올리는 것이며, 이때 올리는 제물이 바로 심신재계와 소원 그리고 사념제거와 일심정성인 것이다.

〈성가〉 135장의 "마음과 몸을 닦고 두 손을 모읍니다." "믿음과 정진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이 노랫말에 진리불공의 핵심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심신재계와 사념이 없는 믿음 그리고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는 정진으로 두 손 모아 소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진리불공인 것이다.

〈대종경〉 교의품 16장의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법신불을 향하여 각기 소원을 세운 후'를 작사가 백인혁 교무는 '사무친 서원일념 촛불이 되어'라는 문학적 표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일체 사념을 제거하고, 선정(禪定)에 들든지 또는 염불과 송경을 하든지 혹은 주문 등을 외어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면'를 '고요하고 밝은 마음 샘물이 되어'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사념이 없는 마음은 고요한 마음이며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는 마음은 밝은 마음으로 샘물처럼 청정한 것이다. 성품의 천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김영신 교무의 〈구도역정기〉의 감상담에 초기교단의 기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구룡헌 대강당 공회당에서는 아침 좌선, 예회, 야회 외에도 특별히 날을 잡아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기도 때는 저녁 시간을 잡았고, 방 한가운데 상위에 청수동이를 놓고 양가에는 촛불 두 개 켜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남자부와 여자부는 상호 반대 위치에서 마주보고 각자의 단별 방위를 따라 자리 잡아 앉았다. 이 기도식에는 대종사 친히 좌정하시어 기도 알리는 죽비를 딱 치면 우리는 일제히 방위별로 〈옥추보경(玉樞寶經)〉을 소리 내어 외웠다. 단별 시방의 단원들이 외우는 경문은 각기 경문이 달랐다. 봉사 경문 외우듯 한다는 말처럼 제각기 다른 독경으로 방안은 장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외우지 않으면 다른 구절과 섞갈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연 일심을 가누어 독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꼭 기미년 간척사업 준공 후 백일기도를 하던 구인선진이나 된 심경으로 이 기도에 온 정성을 들였다. …(중략)… 아무튼 우리는 이 기도에서 많은 심력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나도 이때 어쩐지 힘을 얻은 것 같이 여겨졌다. 생각하면 다 대종사님의 크신 위력을 입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구도역정기〉)

이 일화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제자들이 기도할 때 일심을 가누어 사심 없이 독송토록 하고 있다. 기도의 핵심은 사심 없이 일심정성을 들이대도록 한 것이다.

영겁을 하루같이 살으오리다

진리불공의 핵심은 고백에 있다. 고백은 아뢰고 사뢰는 것으로, 마음 그대로를 법신불인 사은(四恩) 전에 바치는 것이다.

이 고백 의식에 제물이 필요하다. 그 제물은 재계와 소원 세우기와 사념제거 그리고 일심정성이다. 〈대종경〉 교의품 16장 말씀처럼 계문을 지켜 심신을 가지런히 하고, 소원을 세워 선정·염불·송경·주문 등을 일심으로 외워 사념을 제거하고 정성을 올리는 것이다. 고백은 진실이며 일심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공개인 것이다.

우리는 원망이 있고 서운함이 있으면 내 편을 찾아 전화통을 붙잡고 그곳에 마구 쏟아낸다. 중생끼리 고백하면 사단이 생기고 중생심만 증폭되는데, 이것은 고백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토설이요 구토로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법신불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기운으로 공정하게 응하시기 때문에 메아리처럼 정성에 대해 그대로 감응하여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법계를 통해서 법신불에 마음과 기운으로 고백의 대화를 해야 한다. 욕심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진실하게 그대로 고하고 사뢰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면 마음과 기운이 소통되어 위로와 안정 그리고 밝은 지혜가 생기며 더불어 문제도 해소될 것이다.

결국 법신불인 사은 전에 고백하면 낙 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낙 있는 생활을 멀리서만 찾으면 증거 하기가 어려워진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가야 실질적인 진리불공이 되는 것이다. 이 심고와 기도의 효과는 개과천선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악한 마음이 자주 일어나 없애기 힘들 때나 과거의 습관으로 악을 자주 범할 때는 고해(苦海)이므로, 이런 고의 생활을 정성스럽게 법신불 사은전에 실심으로 고백하고 선행을 지성으로 발원하면 개과천선이 되어 낙 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심고와 기도 생활의 가까운 증거이다.(〈대종경〉 교의품 17장)

이 개과천선으로부터 진리의 위력인 천권을 잡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 천권(天權)은 바로 사은의 도로써, 사은의 도를 체받아서 보은하면 삼계의 대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교의품 17장, 불지품 13장) 이러기 위해서는 일천정성이 사무쳐야 되며(교의품 16장) 거짓 없는 심고와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권도편 19장)

이럴 때 '영겁을 하루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영겁이라는 생각도 하루라는 생각도 다 성품 앞에 나타나는 형상으로, 이런 분별을 다 떨구면 시공을 초월한 한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일념이 만년으로, 일념이 짧다는 분별도 만년이 길다는 분별도 없이 순간순간을 오롯이 살게 되는, 일심정성으로 일관하게 되는 것이다.

원음 산책

〈성가〉 135장 고요한 법당의 반주를 듣노라면, 법당을 가득 울리는 웅장하면서도 충만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공명되는 공간의 울림에 따라 호흡도 따라서 깊어지고 아울러 깊은 명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공명되는 울림에 따라 명상이 깊어지듯이 〈성가〉 135장 고요한 법당은 마음에 울림이 생기도록, 첫 음인 '고요한 법--당'은 고요하면서도 법당이 가득 차도록 음색을 내야 할 것이다. '고요한'의 음색이 조용하면서 차분하다면 '법당'의 음색은 굵으면서도 꽉 차도록 내야 할 것이다.

특히 '두 손을 모읍니다'는 마치 합장을 하듯이 노래에 압축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두 손을 모으는 합장에 〈성가〉 135장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친 서원일념'이 '촛-불'이 되도록, 촛불이 불타오르듯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며, '고요하고 밝은 마음'이 '샘-물'이 되도록, 맑고 밝은 샘-물이 되도록 감정을 정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감정의 정화를 '영겁을 하루같이 살으오-리-다'로 이어지게 하여, 이 순간에 충실하도록 노래하면 좋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 마음으로 노래하자는 것이다. 〈성가〉 135장은 못갖춘마디로 시작하며, 붓점의 악센트를 잘 살려 노래해야 하며, 각 소절마다 있는 셋잇단음표의 음의 리듬을 잘 타야 할 것이며, 제자리표(?)와 내림표(♭)의 변음에 따라 평이한 음색이 매력적으로 바뀌게 되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성가〉 135장 고요한 법당은 송관은 교무의 작곡으로 원기75년(1990) 교화부에 의해 성가로 제정된다.
▲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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