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일원상은 진리의 상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원상만큼 완벽한 상징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영적 진화를 제시하는 아봐타(Avatar) 프로그램을 개발한 해리 팔머는 방황하던 젊은 시절, 길에서 진리를 안내하는 구루가 탄 차에 자신도 모르게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구루는 그에게 세 가지 원을 그려 주었다. 이에 감동한 그는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고, 지금은 아봐타를 통해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이 원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인 일원상을 뜻하는 것일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인식기반 위에 그 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원상은 일찍이 위앙종의 전유물이었다. 중국 선종의 5가7종 가운데 하나인 위앙종은 깨달음의 상징을 원으로 표현했다. 깨달음을 묻는 자에게 일원상을 붓으로 그려주거나 허공에 그려보였다. 그것을 깊이 참구해보라는 뜻이다. 한국의 달마라고 부르는 경허스님은 열반송을 통해 일원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가 함께 없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고승들이 큰 깨달음을 얻었거나 열반한 곳, 혹은 큰 가르침을 준 곳에는 일원상이 그려져 있는 곳이 많다. 위앙종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서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상징, 혹은 성자의 혼을 일원상으로 그리기도 한다.

사실 동양에서 일원상은 불타의 설법을 일음(一音)와 원음(圓音)으로부터 표현하는 데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유마경〉에서는 "부처님은 일음으로 법을 설하였으니, 중생들이 각기 그 알음알이에 따른다"고 설한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설한 법은 한 가지이지만, 그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알아듣는다는 뜻이다. 또한 진리를 설하시되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처지나 입장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뜻이다. 중생 모두에게 베풀어 구제해주시기 때문에 원음인 것이다. 원음은 곧 부처의 법문이다. 이를 일음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일음교(一音敎)라고도 한다.

〈대종경〉 실시품에서 소태산은 "온 세상 사람이 다 나의 사람이요, 온 세계 시설이 다 나의 도량"이라고 하며, 제자들은 "능(能)이 없으신 중에 능하지 아니함이 없으시고, 앎이 없으신 중에 알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중생을 교화하심에 덕이 건곤(乾坤)에 승하시고, 사리를 통관하심에 혜광이 일월보다 밝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의 원음이 원음인 이유는 모두를 품 안에 안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덕화가 시방세계 중생에게 두루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자신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천지만물이 일음교를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온 우주가 부처님의 신체일진대, 어느 세계 어느 누가 부처의 품 안을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풀 한포기, 개미 한 마리가 모두 부처의 분신으로 우리에게 법을 설하고 있다. 큰 부처 안의 작은 부처이며, 그 작은 부처는 진리를 드러내는 원음을 통해 큰 부처와 하나가 된다. 바람이 곧 문수보살의 지혜이며, 물이 곧 관음보살의 자비이며, 나무가 곧 중생을 이익 주는 보현보살의 행원이며, 바위가 곧 중생의 아픔을 다 받아주는 지장보살의 보살도이다. 어찌 이 우주 전체가 원음이 아닐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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