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종대왕 8년에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광(光)은 빛이고 화(化)는 천지만물이 조화롭게 생육한다는 뜻의 글자이다. 세종은 빛이 널리 비추어 천지만물이 조화롭게 생육하기를 바라면서 이 문에 광화(光化)라는 이름에 붙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광화문에 불을 질렀고, 광화문은 사라졌다.

임란 이후의 조선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우물 안으로 갇혔다. 열고 나갈 문이 사라졌으나 다른 문을 만들 생각을 안 하고 아예 벽을 쌓아버린 것이었다.

대원군이 다시 광화문을 복원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정남향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빛의 기운이 조화롭게 형성되는 것을 막았다. 일제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식의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나중에 조선총독부를 헐고 경복궁을 다시 복원할 때야 광화문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름 그대로 광화문은 빛이 충만한 문이어야 했다. 하지만 광화문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광화문 뒤의 경복궁이 빛을 내고 광화문은 그 빛을 온누리로 내보낼 뿐이었다. 조선의 경복궁 역할을 하는 곳은 지금의 청와대다. 청와대가 빛을 생산하지 아니하면 광화문과 그 앞의 광장은 어둠에 잠겨 있을 뿐이다. 어둠에 잠긴 광화문으로 어느 순간부터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빛을 내지 못하니 시민이 스스로 빛을 든 것이었다.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죽은 어린 중학생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고자 또래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든 2002년 11월 30일 이래, 광화문은 비폭력 촛불 저항의 광장이 되었다. 광화문에서 최초로 촛불을 든 사람들은 대학생도 지식인도 노동자도 어른도 아니었다. 열네 살 어린 여중생들이 또래 친구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기 위하여 작은 촛불을 들고 모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 개벽은 그렇게 자그마하게 온다. 한꺼번에 거대하게 오지 아니하고 두어 사람의 결단이나 대각으로부터 조금씩 오다가 온누리를 발칵 뒤엎는 거대한 물결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은 고유명사에서 일반명사로 그 뜻이 전환되었다.

광화문에 가 보면, 무수한 천막과 깃발들이 있다. 세월호의 천막들, 비정규직 노동자의 천막, 사드배치 반대 무기한 단식농성 천막 등이 나부끼는 깃발과 함께 낮게 엎드려 있다. 천막 하나하나마다 참으로 간절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천막 옆의 깃발은 삶의 가장 낮은 바닥에 고여 있는 울음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붉은 노을 속에서 나부끼는 세월호의 노란 깃발을 본 적이 있다. 삶의 밑바닥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눈물이 바람에 나부낀다고 생각했다.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광화문에는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는 원불교 교무님들, 광고탑 위에 올라가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세월호의 가족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2017년의 봄은 이 마을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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