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공부

▲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가난할 때 내 것을 내주면 주머니가 더 쪼들려야 하고, 없는 시간을 내주었다면 삶이 더 빡빡해야 하고, 몸 힘든데 봉사를 하면 더 지쳐야 하는데 결과는 그 반대다. 역설적이게도 내줄수록 주머니는 더 풍성해지고, 시간은 더 여유로우며, 건강은 더 좋아진다. 세간의 셈과 정반대다. 베풀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복받기를 원하면서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가 장차 건너가야만 할 다리를 부수며 사는 것과 같다. 삶이 위태하고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보시는 다 내가 나에게 한다. 육근(假我)을 통로로 해서, 일원인 나, 전체인 나(眞我)에게 한다. 일체의 복은 통로가 되었던 바로 그 육근, 나(假我)에게 되돌아온다. 보시가 흘러나왔던 지점으로 확장된 에너지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 소위 복이다. 큰 나, 전체를 다 행복한 낙원이 되게 하면서 육근이 복도 크게 받으니 더할 나위 없다. 물건이든 돈이든 마음이든 몸으로 하든 모든 보시는 결국 다 나에게 한다. 남에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큰 나를 알면 일체에 탈이 없고, 기대할 것도 억울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다.

보시할 때, 같은 값이면 국한 없이 공공으로 베풀어야 공덕이 크다. 그렇다고 개인에겐 아무것도 주지 말란 말이 아니다. 앞에 한 사람만 있으면 그가 곧 전체이고, 열사람이 있으면 열사람이 공공이다. 골고루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참다운 보시다.

맛있는 파전 몇 장이 있다고 해보자. 내 맘에 맞는 옆집에만 몰래 주는 것보다 동네 사람들 불러 한입씩이라도 함께 하면 같은 양을 가지고도 그 공덕은 한사람에게 준 것에 비할 수 없이 크다. 옆집만 주었다면 기껏해야 파전 몇 장이 되돌아 올 테지만, 함께 나누면 동네사람들이 다 몇 장씩 들고 올 게 뻔하다. 한입씩만 먹었다고 한 조각씩만 가져오지 않는다. 같은 양을 가지고 국한 없이 베푸는 공덕도 이와 같다. 평상시에 널리 고루 베풀어 놓으면 항상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 삶이 유여하게 된다.

국한 없이 베푸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탈이 없는 보시가 되어서다. 사적으로만 베풀면 자칫 탈나기 쉽다. 받은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각인되어 기대하는 마음도 절로 생긴다. 되돌아오지 않으면 섭섭함이, 탈이 생기기 쉽다. 파전 하나로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전체에 베풀면, 누구에게만 준 것이 아니어서 따로 받을 생각을 않게 된다. 상이 없으니 괴로울 일이 없다.

보시의 결과가 항상 상대방에서 끝나게 해야 뒤탈이 없다. 이 행위의 결과가 돌고 돌아서 결국 나 좋자고 하는 보시는 다 탈이 난다. 상대가 나로 인해 좋게 되었으면 그걸로 끝이어야 한다. 내게 되돌아 올 것을 생각도, 계산도 없어야, 확장된 에너지인 복이 무위이화로 돌아온다.

보시는 양이 아니라 마음이다.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바탕에 전체를 위하는 공익심이 먼저 준비돼야 한다. 전체를 나로 보는 공익심에서 출발해야 참 보시다. 성자들은 항상 깨어 자성을 떠나지 않으므로, 육근 작용 일체가 보시가 된다. 하여, 복덕이 마를 날이 없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참으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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