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1981년에 개봉된 임권택 감동의 영화 <만다라>를 보면 주인공 법운스님으로 분한 안성기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안에서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용맹정진이라고 하는 것,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로구나'라는 선입견이 그 때 생겼다. 잠도 잘 수 없고 음식을 끓여먹을 수도 없으며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든 축축한 동굴 속에서 자아 안의 울창한 욕망과 정면 대결하는 그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김제 망해사 앞마당이 바다일 때가 있었다. 일제 때 면사무소로 사용하던 목조건물을 그대로 옮겨와 방문객의 숙소로 사용했다. 면사무소 건물이 주는 어떤 독특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곳에서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무렵의 망해사는 자그마한 법당과 더 작은 요사채와 방문객을 맞는 면사무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차담을 나누던 스님이 주지였는지 아니면 잠깐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스님이 "토굴에서 20년간 수행하다 며칠 전에 내려왔습니다"라고 말했다. 20년이나 토굴 속에서 수행한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깔끔한 얼굴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감격스러웠다.

토굴이라면, '산기슭을 파고 들어간 흙굴'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20년이나 어떠한 문명의 혜택도 받지 않고 오직 육체를 극단적으로 고단하게 하여 이뤄낸 영혼의 성취가 어찌 감동스럽지 않겠는가. 토굴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스님이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스님의 토굴은 선운사 근처에 있었다. 도솔암 근처에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보았더니 토굴이 아니라 번듯한 암자였다. 그 암자에는 부엌을 제외하고 방이 둘이었다. 부처님을 모신 방과 스님이 기거하는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스님의 방에는 온갖 문명 기기들이 가득했었다. 커피를 내려주더니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들려주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몇백만원이 넘는 전축과 스피커였다. "이게 토굴이냐 궁전이지?"라고 소리치며 스님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다. 지난 20년 동안 여기에 앉아서 여신도들의 칭송을 받으며 온갖 미사여구로 중생의 고혈을 빨아먹었구나 싶은 마음에 스님에게 욕을 퍼붓고 '그 토굴'에서 나왔다.

그 후로 소위 토굴에 살았다는 스님과 작가들을 몇 만났다. 그들의 토굴은 하나 같이 번듯한 양옥이거나 한옥이었다. 다만 민가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정도만 다를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서재를 토굴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토굴을 흙굴로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허위가 도무지 용납되질 않았다.

나는 언어에 생을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어에 민감하다. 사물이나 현상마다 그에 알맞은 언어가 존재한다. 아파트의 서재도 번듯한 암자도 바닷가의 양옥도 토굴은 아니다.

흙굴은 진짜지만 나머지는 가짜다. 그러나 가짜로 진짜를 대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짜가 진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가짜는 오래지 않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면이 빈약하면 가짜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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