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일 도무

법당의 향 내음과 눈앞에 펼쳐진 일원상과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원불교와 인연이 먼저 닿은 동생들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원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 산외교당(당시 선교소)을 방문했다. 칠보교당(정제원 교무님) 연원으로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환경이 열악한 교당이었지만 넉넉하고 포근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몇 차례 교당을 오가던 중 탁혜진 교무님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입교를 하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교당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풍금 반주에 맞춰 성가를 배우고 가곡을 따라 부르며 추억을 만들어 갔다. 교리에는 문외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 그러하면, 그 업이 쉬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는 법문과 "과거에는 마음이 거짓되고 악한 사람도 당대에는 혹 잘 산 사람이 많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마음이 거짓되고 악한 사람은 당대를 잘 살아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니, 사람들이 자기 일생을 통하여 지은 바 죄복을 자기 당대 안에 거의 다 받을 것이요, 후생으로 미루고 갈 것이 얼마 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세상이 밝아질수록 마음 하나가 참되고 선한 사람은 일체가 다 참되고 선하여 그 앞길이 광명하게 열릴 것이나, 마음 하나가 거짓되고 악한 사람은 일체가 다 거짓되고 악하여 그 앞길이 어둡고 막히리라"는 인과법문을 특히 좋아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교전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다.

학교생활 이외에 대부분의 시간은 교당에서 보냈다. 그 후 박인도 교무님이 부임했을 때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고 고3 시절과 군 입대를 앞둔 수개월간 교당에서 생활을 했다. 법당 한 귀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쪽방이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가건물에서의 생활이었지만 교당에 사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밥 짓고 빨래하고 도량 청소하고 시간을 정확히 맞춰 정성스럽게 조석심고 목탁을 치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았다. 두 분 교무님의 삶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했지만 여러 가지 주위 여건 상 인연이 닿지 않았다.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잠시 출가에 대한 생각을 잊은 듯했다. 교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 제한을 넘기는 시기에는 홀로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교무님들에게 용기 내어 말하지 못했다. 그 후 원불교 기관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다니던 직장을 단숨에 정리하면서 최규원 교무님의 권유로 원광효도마을 법인사무처와 인연이 닿았다.

전주은혜마을로 근무지를 옮겨 생활하던 중 추천 교무님인 김상중 교무님이 그렇게 살려면 출가를 하라며 전무출신 지원서를 가져다 주었다. 참 묘했다. 그동안 출가하라고 권해 줄 만한 교무님들은 주위에 많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출가를 확실하게 권하는 분이 없었던 것이 묘하다. 나 또한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박차고 나가지 못한 것도 묘했다. 그 모든 것이 다 내가 심신을 작용한 결과로 지은대로 받게 되는 인과의 이치를 생각해 보면 굳이 묘하다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수묘 정토가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라며 흔쾌히 출가를 동의해 주고 "정토 역할 잘할 터이니 걱정 말아요"라며 적극적인 지지를 해줬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살림이 줄어들게 되면 한두 평 컨테이너 박스에 살아도 만족하니 속 깊은 마음공부 잘하시고 공사에 전념하세요"라는 진심어린 격려의 말들이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가족들의 든든한 지지아래 도무로 원기96년에 출가식을 마치고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법인사무처로 인사발령을 받아 현재 6년째 근무 중이다. 속 깊은 마음공부를 알뜰히 하는 전무출신, 대종사님과 선진님 그리고 스승님들께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전무출신, 교화를 잘하는 전무출신의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한 마음 챙긴다.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법인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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