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고 마음 챙기면 행복해져요"

한 사람의 일생에 그 방향의 선택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던가. 전생에 인연이 지중했던지 영산 시골마을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윗동네 정녀(여성교무)들의 모습을 보고 마냥 저러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출가했던 산타원 김정민(73·山陀圓 金正敏) 원로교무. 스스로 택한 길을 한평생 당당하게 살다보니 한없이 행복한 길을 찾았다는 그 미소에는 인생의 깊은 지혜가 뭍어나왔다.

일생의 방향을 선택하다

영산 천정리가 고향이었던 그는 교도 연원달기 운동이 한창일 때, 동네 아주머니가 입교시켰다. "어릴 적부터 내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봉공하면서 세상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래서 어느 장소를 선택해서 일생을 바쳐 살 것인지가 늘 화두였어요."

사춘기 시절 집에 외할머니가 오시더니 영산성지 구경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이날이 그의 일생에 방향을 선택하는 날이 될 줄이야.

"정녀들이 정관평 언답에서 노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동정심이 느껴졌어요. 여자들이 왜 저렇게 힘든 일을 할까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점심시간이 돼서 돌아나오는 모습이 마치 선녀같았어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발심이 났던 거죠."

스무 살 남짓할 즈음 스스로 인생을 선택할 시간이 된 것을 안 그는 막무가내로 영산교당을 찾아갔다. 스무살 처녀가 난데없이 찾아와 출가하겠다고 하니 당시 영산교당에 주재했던 건타원 김대건 교무는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처음에는 거절하시더라고요.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3일 정도 더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3일 뒤 다시 찾아뵈었죠."

영산 일대 가까운 교당에서 간사근무를 하자는 말씀에 '부모님이 언제 와 데려갈지 모르니 먼 곳에서 하고 싶다'고 말한 그는 부산 동래수양원에서 덕타원 정양선 교무를 모시고 살았다.

한 평생 큰 보감이 됐던 법문

영산 2년, 동산선원 2년 수학기간을 마치고 부교무 발령을 받아야 할 시기가 왔다. 정녀의 일생을 스스로 선택해서였을까. 첫 부교무 발령지도 총부에서 먼저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는 당시에 중앙총부를 모르고 일생을 살 수 없으니 총부에 살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그래서 교화부에 발령을 받았는데, 부교무가 많이 부족한 현실이라 당시 초량교당에 가야할 상황이어서 1년 못 채우고 현장으로 다시 발령받았어요."

총부에 얼마간 살지 못했어도 그가 인생의 큰 법문을 양산 김중묵 종사에게 받든 일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중앙총부가 막 건설되고 있을 때라 사무 볼 수 있는 공간은 없지, 공사하느라 구내는 복잡하지, 톱 써는 소리부터 장비 돌아가는 소리들로 항상 시끄러웠죠. 어느날 양산 법사님이 지나가시길래 제가 '언제까지 이 소리 듣고 살아야 돼요? 총부 시끄러워서 못 살겠어요'하니까, 제 옆으로 오셔서 '그렇게 멍청해서 철이 안 나지! 저 소리가 얼마나 좋은 소리냐. 중앙총부 올라가는 소리 아니냐. 원불교가 발전하고 우리가 발전하는 소리를 싫어하면 어떡하냐'고 하시는 거예요. 당시 저에게 굉장히 큰 울림을 주신 법문이었어요."

그에게 양산 종사의 법문은 또 한 방향의 일생을 세워줬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복잡한 일일지라도 모두가 다 의미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것을 싫어하거나 밀어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훗날 어느 자리를 가든지 그가 맞을 어려운 경계에 초연할 수 있는 큰 법문이 됐다.

교화자의 발길

교당 발령으로는 처음이었던 초량교당에서는 생각지 못한 학생교화 재미에 푹 빠졌다. 당시 부산 명문학교였던 경남여고, 부산고, 부산데레사여고 등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명문고 학생들이라 그런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레크리에이션이면 레크리에이션, 합창이면 합창, 문예활동 등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연초가 되면 자신들끼리 조직을 이뤄 타 학교에 교화를 하러 떠났다.

"적어도 학생들이 80여 명까지 모였던 것 같아요. 학생들 스스로 교화방법도 짰는데, 그룹을 지어서 다른 학교에 교화하러 가는 거예요. 남학생 고등학교에 교화하러 갈 때면 여학생이 끼어서 갔는데, 나무그늘에 자기들끼리 앉아있으면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모여들었죠. 그러면 얘들이 원불교 가자고 명단을 적어왔어요." 다음날 법회 때가 되면 교당 대문 앞에 학생들이 와글와글 찾아왔다.

이렇게 행복하게 2년을 살고보니 어려운 곳을 찾아 근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리보육원에 근무를 했다. 보육원 아이들은 너무나 달랐다. 조금만 잘해주고 관심 가지면 시도 때도 없이 '신발 닦아드릴까요'하면서 종일 따라다녔지만, 조금만 외면한다 싶으면 '언제 알았냐'고 철저하게 변해버렸다. 야단칠 수도 없었고, 친절하게 해줄 수도 없었다. 배신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관심 유무에 극도로 예민한 것이다.

"그때 알았어요. 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죄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요."
시간이 지나 보육원에 여자교무 3명이 근무하게 되자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공해야겠다고 생각해 상주 개척지로 향했다.

아인슈타인의 서재

원기60년 상주교당을 가려고 하는데 상주가 어디에 있는지 총무부도 주소를 몰라 일단 대구교당을 찾았다.
법신불일원상을 직접 모시고 찾아간 상주교당은 10여평 남짓한 셋방이었다. 하지만 그 좁은 셋방에 드나드는 교도들은 하나같이 고위급 사람들이었다. 변호사, 농촌지도소 소장, 서울경기고보 교장 등 양반도시 상주에서도 뼈대 있는 집안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들을 위한 법회를 진행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설교에서 말이다.

"학창시절에 각산 신도형 종사께 강의를 많이 들으면서 공부했었죠. 저녁에 졸려서 밖으로 나와 배회하는데 깜깜한 곳에 그 어른이 앉아계신 거예요. 그래서 '뭐하세요' 여쭈었더니, 뜬금없이 '아인슈타인 서재에는 책이 없다네. 설교를 책으로 준비하면 대중을 감화 못 시켜. 그러니까 머리로 설교를 준비해야 대중을 감화시킬 수 있지. 지금 설교 연마 중이네' 하셨어요."

그때 말씀대로 그는 설교안 작성을 글로 하지 않고 대강 메모로 줄거리 잡고 설교하는 연습을 해왔던 것이다. 활달한 성품에 영감에서 나온 설교는 즉흥적인 것 같지만, 핵심이 있고 전달력이 있었다. 어린이·청소년 출석, 유지비·보은미도 알기 쉽게 그래프로 붙여서 누가 언제 왔고, 누가 얼만큼 냈는지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교당을 경영했던 것도 교도들에게 호응을 일으켰다.

이후 남대전교당, 진북교당, 포항교당, 신마산교당을 두루 거치면서 60세 즈음이 되어서 웅산선교소에 들어갔다. 이 역시 그가 선택한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안정된 교당을 다 잡고 있으면 젊은 교역자들이 설 곳이 없어져요. 그래서 나도 60이 넘으면 바로 약세교당으로 가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해왔었던 것이지요."

행복, 멈추는 곳에서 시작

원기99년 퇴임한 그는 요즘 교단의 여러 이슈와 현안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교단이 발전해야 되고, 교화도 잘 돼야 하고, 후진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단체라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단인데 자연스레 많은 주장들이 나오게 돼 있죠. 긍정적으로 대합력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모두 발전하는 소리, 진행되려는 소리라는 것이다.

"제가 살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인연을 책임져야 하고, 제 영혼을 책임져야 하고, 제 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그 방법을 다 알고 있어요. 멈추고 마음 챙기면 행복해지잖아요."
한 방향을 선택해 일평생을 살아온 그의 말 속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의미가 묘하게 살아나 깊은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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