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宙神摘氣摘氣 十方神接氣接氣

▲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 신안군 임자도 근해 무인도 타리섬은 6~8월경에 파시가 벌어진다. 당시 민어파시로 유명했으며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스승죽음 직후 19세 삼밭재 삿갓집, 일타동공일타래 주력수행

21세 타리파시 뱃길에서 우주신적기적기 독자적인 주문 독공

23~24세시 우두커니병 〈이 일을 어찌 할꼬〉는 간화선형태 수행


처화 19세(1909) 1월, 결혼 4년만에 첫 딸을 보았다. 호사다마랄까. 부친 박성삼은 지주 조 박사에게 마름 자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수십년간 소작인들에게 받지 못한 소작료까지 소급하여 채무 변제하라는 덤터기를 씌웠다. '백수면 인심은 박성삼이 다 얻고 영광바닥 욕은 조 박사가 다 먹는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소작인들의 세정을 헤아리고 경우 바른 마름(舍音)으로 존경받던 박성삼은 고질인 천식에다 심장병이 도져 자리에 누웠다. 영광 함평 골목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 '직사박사 조박사 영광읍내 조박사'의 악질지주 횡포가 박처화의 구도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승님 죽음 직후, 처화는 큰외삼촌 유선숙(劉善淑)이 소나무를 엮어 지어준 삼밭재 삿갓집에서 혼자 수행독공에 들어갔다.

스승화천(化天) 후 독자적인 주문수행 주력

삼밭재 독공 첫날 처화는 엄청난 신비체험을 한다. 태을주도 아니었고 시천주도 아니었다. 전연 새로운 타입의 주문이 술술 흘러나왔다. 일타동공일타래(一陀同功一陀來) 이타동공이타래 삼타동공삼타래 사타동공사타래 오타동공오타래 육타동공육타래 칠타동공칠타래 팔타동공팔타래 구타동공구타래 십타동공십타래 구타동공구타래 팔타동공팔타래 칠타동공칠타래 육타동공육타래 오타동공오타래 사타동공사타래 삼타동공삼타래 이타동공이타래 일타동공일타래 … 일사불란 끝없이 주문이 흘러나왔다. 공(功) 하나 함께 하면 하나의 깨달음이 오고 공을 둘이 함께 하면 두 배의 깨달음이 온다는 일타동공주(一陀同功呪)였다.

부친상 뒤 처화가 조 박사한테 빚 독촉 성화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박성삼의 절친 김성서(金聖西; 김형오의 조부)가 채무 청산할 방도를 내었다. 생질녀 바랭이네(四陀圓)가 두 자식을 데리고 고단하게 사는 것을 보고 흙구덩이터에 주막을 차려주고(현 성지고 정문 앞 20m에 위치함) 빚을 갚으라며 두 사람의 연을 맺어주었다. 음식 솜씨가 좋고 후덕한 바랭이네는 남에게 베풀기는 잘해도 셈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당연히 기둥서방이 챙겨야 하는데 귀영바위 굴에 앉아 만날 일타동공일타래 주력송만 하고 있으니 장사는 잘되는데 뒤로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보다 못해 단골주객 작은외삼촌 유성국의 절친 이인명(李仁明; 二山)이 같이 장사를 가자 꾀였다. 칠산바다 조기파시가 한물가고 임자도 근해 타리 민어파시가 시작될 때였다. 비상한 결심을 하고 바랭이네와 강변나루에서 새벽 뱃길을 나서 종일 칠산바다를 가는데 망망대해를 처음 접한 처화는 불현듯 새 주문이 떠올랐다. 우주신적기적기(宇宙神摘氣摘氣) 시방신접기접기(十方神接氣接氣)….

타리섬에서 좋은 인연을 만났다. 밀양박씨 객주의 소개로 민어 잡이에 나서는 어선에 물자를 대주는 장사였다. 여기서 박처화는 장사하는 데만 주력하지 않고 그들의 안전과 민어잡이가 원만성취되기를 계속 빌었다. 우주신적기적기 시방신접기접기…종일 쭝얼쭝얼 <접기적기주(接氣摘氣呪)> 주문을 일심 독송했다. 그 기운이 온 바다에 가득 차고 넘쳤다. 삼밭재에서부터 다져진 일심 기운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스승과 부친이 돌아가시고 거기에 국망(國亡)의 설음까지 더해져,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절대자아(絶對自我) 굳은 의지가 구천에 사무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치대로 주력(呪力)의 기운이 충만되었다. 희한한 일도 다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돌아오는 어선마다 만선이 되어 풍장을 치고 돌아오는 기현상을 보게 되었다. 박 서방한테 물건을 가져가면 대복이 터진다는 소문이 나, 선주들은 곱전을 주고라도 박 서방한테 물건을 가져가지 못해 한이었다.

처화 일행이 추석이 되어 귀향할 때는 딱 빚 갚을 만큼 돈을 벌었다. 귀로에 풍랑을 만나서도 시방신접기접기 우주신적기적기적기 기도하였다. 우주와 시방의 기운이 응하였다. 그 길로 바로 영광성내 조박사 댁으로 갔다. 다음 일화는 처화와 바랭이네 연을 맺게 해준 김성서, 그의 손자 김형오 선생의 이야기다.

빚 갚고 영광 조박사 혼내

조 박사가 삼칸방 아랫목에 앉아 담뱃대를 물고 정자관 쓰고 앉았단 말이여. 종사님 들어가시니까 "어, 성삼이 아들인가. 빚 갚으러 왔는가?" 종사님께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한 말씀을 하셔.

"지는 어르신께서 박사 벼슬도 하시고 돈도 많으시고 양반인 줄 알았더니 행실은 영판 순 상놈 올씨다. 인간이란 것은 예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요. 어르신네하고 우리 집하고 선대부터 서로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믿고 소작 일을 맡긴 거 아니다요? 그런다면 당연히 지가 가친상을 당해 상중이니 찾아와서 조문은 못할지언정, 시방 지가 이 자리에 왔으니 먼저 인사를 닦아야 할 참인데, 돈 먼저 이야기하니 이건 개 상놈이 하는 행실이 아니다요?"

인자 스물한 살 청년이 열다섯이나 더 먹은 위세 있는 부자한테 순 상놈이라고 했으니 그 꼴이 어떻게 되겠어. 가만 생각해보시요. 보통 담력으로 하겠는가. "괘심한 놈!"이라고 그러시면서 허리에 찼던 돈 자루를 들고 "아나, 권리금 합쳐 돈 여기 있다. 돈 받아라!" 하고 조 박사 앞에 내리 때렸단 말이여. 돈 자루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 떨어지드끼 났어.
▲ 1943년 박창기가 촬영한 흙구덩이 터는 영산성지고등학교 20m에 위치한다.
부채 청산후 우두커니병 도져

부채 청산 후 처화는 다시 막막한 지경으로 돌아갔다. 스물네 살까지 "이 일을 어찌 할꼬" 걱정거리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일이 계속되었다. 흙구덩이 주막이 장맛비로 무너지자 네 식구는 노루목 오두막 빈집으로 옮겼다. 흙구덩이주막 빈터는 김성서가 장녀 김동수(金東壽)에게 물러주었다. 김동수는 박처화와 동갑내기로 뒷날 영산지부의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땅에 남편 정일지가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짓고 누에치기를 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고 동명을 '잠실'이라 하였다. 김동수는 남편과 4남매 정광훈·라선·양선·양진을 전무출신시켰다. 그녀는 '흙구덩이주막 터'를 굉장히 소중히 여겨 아들 대(영산지부장 정학현)까지 해마다 그 자리에 나뭇가지를 꽂아놓고 이를 잊지 않도록 하였다. (1970년대 필자가 취재차 영산성지에 드나들며 확인한 사실임)

처화 24세 무렵 집념이 워낙 외골수여서 360혈이 막혀 온몸에 종창이 발생, 하루에도 한 됫박씩 부스럼딱지가 나오고, 배는 산달이 임박한 임산부처럼 팽만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용천뱅이(문둥병자)로 알고 노루목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고 멀리 피해 돌아다녔다. 구호동 장촌댁(大師母)은 판수에게 점을 보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였다. 모친 유씨는 영광성내 무령재 너머 군도리에 사는 막내 한석에게 의탁하였다.

경우 바르다 박성삼은 길룡리 6걸 중의 한 사람이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지만 영대가 밝고 이문(계산)이 빨라 소작인들에게 선재를 받을 때 소작인들 간의 시비를 똑바르게 처사하여 판관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후처의 의붓자녀들까지 합쳐 모두 5남3녀를 두었다. 박성삼은 이들 중 가장 총명한 일곱째 처화를 대를 이을 후사로 삼았다.

평소 덕을 베풀어 친척들에게 신임을 얻은 박성삼은 생전에 자녀들의 살 길을 미리 챙겨놓았다. 장남을 손이 없는 녹사리 당고모에게 출계시키고 (차남 17세 요절) 막내는 군도리 당숙에게 출계시켜 군도리에서 요족한 살림을 살게 하였다.

소태산은 출정오도 후 천지부모은덕과 형제간의 우애 세계동포은덕 그리고 법률은덕, 사중은덕(四重恩德)으로 대각하였음을 <보은 경축가>에서 노래하였고 방언공사할 때도 형제들이 합심하여 숯장사를 하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사은사상(四恩思想)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영산성지고등학교 전경. 정문 20m앞에 '흙구덩이 주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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