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법은 한국 여성들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

인터뷰 전문(全文)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법 전문가인 양현아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를 만났다. 여성평화외교포럼의 회원으로 중앙총부를 방문한 그는 본사와 인터뷰에서 "법여성학이란 우리 법체계 전반에 여성의 관점을 녹여내고 하는 전방위적이고 유연한 지적·정책적 노력"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미국 뉴스쿨(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공분야 이외에도 법학, 한국학, 식민주의 연구 등에 발을 들여놓아 학제간 연구를 추구하고 있다. 그와 인터뷰는 익산역 한 카페에서 이공현 은덕문화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법여성학은 다소 생소한데 어떤 학문인가.
"법여성학은 현재 젠더법학이라고도 부른다. 젠더, 즉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는 학문이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법현상을 바라보는 분야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법체계를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현실사회의 견지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법 안에 녹아져 있는 성차별적인 법 조항들을 폐지하는 동시에 성평등을 촉진하는 법을 만들어 평등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호주제도, 동성동본폐지 등은 성차별적인 법제도의 사례라고 할 수 있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과 같은 법 제정은 성평등을 촉진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차별의 법률과 관행을 폐지하는 일도 어렵지만 성평등을 촉진하는 법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형식적, 기계적 평등을 넘어서서 여성과 남성간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수용하는 실질적 평등을 법 정책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세제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여성의 피부양자 연령은 대개 50세 혹은 55세부터라면, 남성은 55세 혹은 60세 이상이어야 한다. 이렇게 피부양자 자격에서 남성보다 여성연령이 낮은 것은, 현실적인 남녀의 차이를 고려하여 여성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남녀가 불평등한 고용 현실을 받아들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낮은 취업률과 남성보다 이른 정년 연령과 맞닿아 있는 낮은 직급이나 비정규직 등의 문제를 정당화하는 제도가 될 수도 있다. 법여성학은 이와 같이 성차별의 철폐와 성평등을 촉진하는 분야로 나눌 수 있다. 나아가, 법을 통해서 우리 사회와 역사를 해석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 저서인 〈한국 가족법 읽기〉를 보면 가족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일제강점기부터 100년에 걸친 역사를 사회학적, 법해석학적으로 분석해 놓았다. 한국에서 가족법은 무엇인가.
"사실 〈한국 가족법 읽기〉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해서 이후 보충한 책이다. 논문을 쓸 때 예초부터 한국 가족법을 역사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별반 없었다. 그런데 당시의 가족법 조문과 용어 등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예컨대 호주와 가족이라는 장에서 보면 본인(本人)과 가족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여기서, 본인이란 대개 호주를 지칭하고, 가족은 호주 이외의 가족구성원을 의미했다. 이런 표현이나 어법들이 일상적인 것과 달랐고 그 문법이 어색했다. 이런 조문들이 어디에서 왔을까를 살펴보면서 나의 논문은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론을 취하게 됐다. 한국의 친족상속법은 1957년 민법제정과 함께 만들어졌지만, 식민지 시대의 법제의 영향이 깊숙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1945년 탈식민 이후 우리 입법부에서 식민지 영향에 대한 대면과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고 '전통존중론'과 '근대주의'라는 대립 속에서 민법이 제정되던 역사를 살펴보게 됐다. 왜 법문과 판례에 녹아있는 식민지성을 대면하지 않았을까. 순수한 '전통'은 어느 시대의 전통을 말하며, 그것을 복원하면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가족법이 완성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을 우리 '어머니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이고 저술이다.
한국의 가족법에는 여러 시대의 산물이 마치 지층(地層)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 식민지 시대의 눈에서 본 조선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의 자본주의 시대 등이 그것이다. 물론 남성들에게도 한국 가족법은 다층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는 법이지만 여성에게는 그 가부장성 때문에 더욱 더 화해되지 않은 다층성이 혼란스럽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여성의 주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여성의 주체성의 한 다리는 조선시대에, 다른 한 다리는 식민지시대에, 한쪽 팔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다른 팔은 탈산업화 사회에 놓여 있는 식이다. 호주제도로 인하여 최근까지 한국의 여성들을 반드시 아들 하나를 낳아서 대를 이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딸과 아들이 평등하니 동등한 재산상속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나아가 이혼시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다.
이것이 80년대 말, 90년대 초 한국 여성의 상황이었다. 가족법은 한국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요, 그 안에서 여성과 남성이 살았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 가족법을 공부하면서 한국 역사를 새롭게 읽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 가족법을 읽다보니 한국의 (근대)역사에 대한 분석이 됐다. 우리 어머니가 살았을 공간, 할머니들 살아냈을 공간을 (조선, 식민지, 근대라는 관점에서) 독해했다고 본다. 1960년대는 한국여성의 합계출산율(가임여성 한 명이 평생동안 낳을 자녀의 추정치)가 6명 정도였는데 비해, 1980년 말이 되면 그것이 2명대로 감소하게 된다. 모든 가정에서 아들을 낳는 것은 불가능해 졌는데도 제도가 남아 있었다. 실제로 1960년대와 호주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인 2000년 초까지 여성들은 대를 이를 아들을 갖기 위해서 여아낙태를 감행하고, 혼외아들의 묵시적 인정, 비밀 입양 등 무수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대면되지 않은 역사의 모순이 여성의 몸과 주체성에 고스란히 전가되었던 것이다."

- 가족법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법률가로서 사회개혁의 실천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여성주의 법학자로 알려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깊숙이 관여했다. 호주제 폐지운동은 1950년대 초부터 꾸준하게 전개되었지만 1990년대까지 성과를 보지 못했다. 2000년경에 호주제 폐지를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호주제 위헌제청에 대해 논의했다. 호주제가 어떻게 성차별적인지는 이미 많은 사례를 통해 축적되고 증명된 시점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나는 '호주제 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이 주제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발표와 토론을 했다. 내가 발표했던 주제는 호주제도의 성차별성 뿐만 그 식민지성에 대한 것이었다. 호주제도는 유림들이 옹호하는 진정한 '전통'이 아니라는 것을 '조선민사령,' 일본의 구민법(舊民法), 식민지시기 호적제도 등의 견지에서 밝혀 나갔고, 설사 진정한 전통이라고 해도 그것은 현재의 시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쓰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여성의 위치가 그 전통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 등을 말하고 다녔다. 이런 호주제 폐지의 싸움에서 유림은 호주제도가 전통이라고 결사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다보니 나와 같은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가부장제가 아닌 이른바 전통과 싸워야 했고, 페미니즘은 전통에 반하는 사유체계로 표상되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호주제도는 조선시대의 가족제도에다가 일본의 가제도를 이식시킨 제도로서, 일본의 호주제와도 상이한 기이한 제도였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종(宗)제도에 훨씬 소규모의 가제도(家制度)를 착종(錯綜)시킨 것이라는 것이 나의 테제였다. 전통이라는 것은 한 시대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필요와 인권에 부합하도록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통에는 여성도 발화자가 돼야 한다."

- 뿐만 아니라 태아 성별고지나 낙태죄, 군대제도 등에도 참여한 줄 안다.
"구의료법에는 초음파를 통해서 알게 된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한 조문이 있었다. 본 조문은 헌법소원에 의해서 그 금지가 해제됐다.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은 법이며, 여태아를 낙태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인식 자체가 인권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형법상의 낙태죄의 경우에는 낙태시술을 줄이는데 기여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세계적으로 낙태금지정책이 없는 나라에서 낙태수가 적은 반면, 낙태를 형법으로 다스리는 국가들이 낙태수가 암수적으로 높은 국가들이다. 그것은 낙태를 금지하지 않는 국가들은 성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며, 피임의 실천율이 높고, 임신여성에 대한 상담과 지원이 보다 잘 이루어지며, 미혼모라도 아이를 낳은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낙태 선택권을 부여하는 국가가 일반적으로 성평등한 국가군이다. 한국은 오로지 낙태를 금지하는 형식만으로 임신과 출산 선택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말 수준 낮은 인구 재생산정책이라고 본다. 이렇게 낙태죄 폐지의 나의 입장은 낙태가 좋은 현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재생산정책을 위해서는 성교육, 피임정책 등 다초점 정책을 펼쳐야 하고, 임신과 출산의 선택권을 개인 특히 어머니들에게 돌려주고 국가는 이들의 선택을 지원하고 지지하라는 모델이다. 또한 현행 병역법에서 남성만 의무 군인으로 징집하고 여성은 자원에 의해 군간부로만 복무할 수 있는 조문이 있는데 이에 대해 여러 차례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제도가 남성차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여성에게 군대 면제를 해 주는 것이 '수혜'라고 우리 정부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성들이 면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지, 현대전쟁에서 여성들이 왜 전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지 좀더 상세하게 군인의 직무을 분류하여 설명할 책임이 국방부와 정부에게 있다고 본다. 여성이 군대를 가지 않는 것이 기존의 성역할을 강화시키고 여성을 2등 시민화할 수 있다고 본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활동은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일본 동경에서 열렸던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국제여성법정'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시민법정에서 남북한공동기소단 검사로 활동했고, 그 시기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터뷰하여 증언집을 내는 작업을 했다. 2000년 12월8일~12일에 진행된 이 법정에는 10여개국 시민단체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며, 약 1000여명의 방청객, 미디어 관계자 등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판결문이 <히로히토 유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출간)라는 책으로 번역됐다. 한일협정이나 샌프란시스코 협약 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책임이 남아 있다는 점에 대한 법적인 논거를 구성하고 법적책임을 이행하도록 하는 여러 권고들이 담겨있는 판결문이다.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와 여성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학자들은 20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정도까지 추산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 10여개국 피해자 중에서 조선여성이 가장 다수를 이루었다는 점에는 이의(異意)가 없다.
또한 위 법정에서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남북공동기소장'을 작성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분단된 조국에서 떨어져 살다가 일본에서 증언 발표회를 개최했을 때, 남북한 할머니들이 해후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제로 끌려갔던 꽃다운 나이 17~20세에 만났던 이들이 이날 서로 만나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분단 이전에 발생했던 인권유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남과 북이 하나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여는데 과거의 문제가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일본 정부는 '2000년 법정'을 무시해 왔다. 다른 한편,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위안부 합의'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며 최근 5월12일 유엔 인권 최고기구 산하 고문방지위원회에서 한국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이루어졌던 한일위안부 합의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여성의 주인공이자 그저 동정이나 받을 타자(他者)들이 아니다. 17년 전 '2000년 법정'은 미래세대에 의해 그 의미가 다시 해석될 것이다."

- 원불교 양성평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원불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이선종 교무님이나 은덕문화원, 관련 교무님들을 통해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불교 혹은 다른 종교와 달리 여성 사제들이 다수를 이루며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최고 의결기관인 수위단회를 남녀 동수로 구성한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획기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한편 겉모습을 보면 사회의 성역할도 남아있는 것 같다. 여성 성직자들의 의상, 머리모양 등은 원불교 교무임을 금방 알게 하고 다소 조선시대적인 반면, 남성 성직자들은 일반인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현대적인 것 같다. 여성들을 정녀(貞女)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그러한데, 남성사제들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이러다 보니 요즘의 좋은 여성 인재들이 교무의 길을 걸으려 할지 의문이다.
또한 교무의 경험과 조직운영에 있어서 여성성을 발현할 수 있는지도 중요할 것 같다. 여성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 길들여진 여성성과 본원적인 여성성이 서로 뒤엉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성은 사유의 방식이나 선택에서 복수적이며 유연하다. 수직적이기 보다 수평적이고, 평등지향적인 사고를 한다. 여성성의 발현은 여성이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생긴 대로' 표현해도 처벌받거나 왕따 당하지 않을 때 가능할 것이다. 즉,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조직이 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러한 상태는 사실 원불교 교단을 넘어서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그리 가능한 상태는 아니라고 보인다. 원불교의 성평등에 관한 지금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원불교의 성평등 의식이 상당히 높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모쪼록 최고 책임자에도 여성성이 발현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양현아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여성학·법사회학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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