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공부

▲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 모름지기 선행은 들키기를, 악행은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본능인 법. 남들이 모르기를 바라는 선행이 얼마나 있을까. 은밀히 하면서도 제발 봐줬으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저 바탕에 자리하기 마련이다.

자기 입으로 선행을, 보시를 떠벌리거나 자랑 말고 은밀히 하라는 말씀인데, 사실 은밀히 한다고 무상보시는 아니다. 혹시 남이 모를까 봐 안달나서 자기 공을 자기 입으로 다 떠벌리며 결코 손해보지 않는 '영리한' 이들도 많다. 양념으로 과장이 곁들여지는 게 보통이다. 입 근질거리는 것 참기도 쉽지 않다. 못 참고 자기 입으로 뱉으면 무상보시에는 근처도 못간다. 완전 하수지만, 이런 선행도 안 한 것보단 백배 낫다.

본의 아니게 선행이 드러나면 손사래 치며 공을 남에게 돌리거나 겸양하는 보기 드문 인격자도 있다. 공덕이 천배는 더해질 고수지만, 그런다고 무상보시라 할 수는 없다. 겸양이나 입 무거운 것이 무상보시는 아니다. 말을 하고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보시란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잘 참으며 '은밀히' 간직하는 수준이 아니다. 마음이 근질거리는 것, 속으로 떠들어도 매한가지다. '내가 이러이러한 선행을 했어, 참 잘한 일이야, 나는 남들과 달라' 하며 속으로 떠드는 소리가 있다. 무상보시는 이처럼 마음 근질거리는 것도 없는 상태다. 애써 잊으려 해도 마찬가지다. 잊으려 하는 그 맘도 없어야 한다. 인위적으로 없애려는 어떤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말해서도 안되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잊으려고 노력해서도 무상보시가 아니라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무루의 공덕이 오는 무상보시는 깨달음 없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달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인 것을 모르면, 상대방이 있으면 내가 남에게 무엇을 했다는 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따로 있지 않음을 알아야만 가능하다. 전체인 나, 일원인 나를 깨닫지 못하고는 무상보시를 행할 수 없고 무루의 공덕도 오지 않는다.

무위(無爲)로써 하는(有爲) 경지가 무상보시다. 온통 나 뿐이니, 상대가 없으니 상을 없앨 것 없이 저절로 무상이다. 소위 일체의 '보시'는 일원으로서의 나의 '작용'일 뿐이다. 일체 행이 '그냥' 나한테 한 것이므로 애써 감추려 하거나 잊으려 하지 않아도 아무 흔적도 그림자도 있을수 없다.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함'과는 견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왼손 오른손이 따로 없이 일체가 나다. 일체가 나 뿐인 걸, 내게 하는 것을 어찌 보시라고, 구제라고, 선행이라고 할 수 있으랴.

상대가 끊어진 그 절대의 본성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오는 작용이 무상보시다. 시방삼계가 나(吾家)임을 직관해야만 가능하다. 깨쳤어도 내가 선행을 했거니 하는 상이 남으면 다시 상대가 생긴 것이다. 일원을, 자성을 떠난 증거이니 즉시 알아차릴 일이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마다하고 아름다운 퇴장을 하는 이들에게 찬사가 쏟아진다. 참 좋은 일이다. 그 마음 안에 '내가 아름다운 퇴장을 하느니' 하는 상까지 없길 바라는건 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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