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인시장의 명물인 할머니 기름떡볶이를 2냥에 구입하는 어린이,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분식류는 주인이 도시락 칸에 맞게 담아준다.
서울 도심 '뜨는 동네' 서촌의 핫플레이스 통인시장

10냥에 5000원 , 2냥짜리 먹거리로 도시락 채우는 재미

주말이면 2천명 몰려, 수익 올리는 시장 기능 복원이 관건




"시원한 콩국수가 두냥이에요, 두냥~"
"가래떡 품은 떡갈비가 한냥에 한 개!!"

나들이 하기 좋은 5월 주말,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에 울려퍼지는 홍보 멘트는 뭔가 특이하다. 천원, 이천원이 아닌 두냥, 한냥. 그러고보니 시장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 모두 손에 지폐나 카드가 아닌 엽전꾸러미가 들려있다. 수백 년을 건너 21세기에 다시 돌아온 짤랑거리는 엽전, 사극에서나 보던 이 엽전이야말로 통인시장을 되살린 일등공신이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뜨는 동네' 서울 서촌 통인동. 경복궁과 광화문, 청와대와 인접해있는 통인동은 고급스러운 부티크와 바리스타가 자기 이름을 걸고 내놓는 커피숍 등이 밀집해있다. 음식도 맵고 짜고 자극적인 고기류나 흔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아닌, 담박하고 간결한 메밀집이나 정갈한 한식을 내는 식당이 즐비하다. 화려하게 꾸민 젊은이들보다 원숙미 넘치는 중장년이 어울리는 동네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통인동은 워낙 땅값이 비싸고 분위기가 폐쇄적이라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좁은 골목의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동네 사람들이 찬거리나 사러 나왔던 좁은 골목의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곳이었다.

여타의 시장처럼 통인시장도 2000년을 전후해 퇴로를 걸었다. 주 고객이었던 인왕산 아래 아파트가 1996년 공원으로 변하면서 타격이 컸다. 게다가 주차가 어려워 사람들이 점점 발길을 끊었다. 당시 80개에 달했던 점포는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CCTV에 상인들 뿐 손님이 한명도 안 찍힌다"는 흉흉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변화가 온 것은 2010년, 서울시와 종로구가 주관하는 '서울형 문화시장'으로 선정되면서다. 뭔가 변해야 한다는 절치부심 끝에 상인들은 손을 잡고 2011년 '마을기업'으로 발돋움한다. 이 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도시락카페'로, 엽전은 조금 뒤에 추가된 기획이었다.

처음에는 주변에 많이 상주하는 맞벌이부부를 겨냥했다. 퇴근길 저녁 및 다음날 아침 식사로 양이 적고 가짓수가 많은 도시락이 제격이었고, 유난히 먹거리 점포가 많았던 시장 특성에도 잘 맞았다. 뭔가 다른 재미를 주기 위해, 1장당 500원인 종이쿠폰을 인쇄해 썼다.

칸칸이 나눠진 도시락에 소복이 담아주는 떡볶이가 1천원, 고소한 빈대떡 한 장이 5백원, 시원한 동치미 한 컵이 1천원 등등, 내 마음대로 조금씩 담을 수 있는 통인시장 도시락 시스템은 삽시간에 인기를 끌었다. 엽전은 이때 나왔다. 고객이 몰리자 쉽게 훼손되는 종이쿠폰 대신 엽전을 쓰자는 아이디어가 '반짝' 한 것이다.

통인시장의 연간 방문객은 이후 매년 늘어 2012년 5만 명에서 2013년 9만5천 명, 2014년 17만 명, 2015년 20만 명 등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평일 500~600명, 주말이면 1500~2000명이 된다고 하니 그 인기는 고공행진 중이다.

통인시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장날은 토요일이다. 평일에는 엽전을 시장 내 센터에서만 판매하지만, 토요일엔 아예 입구로 나와 엽전 10개와 1회용 도시락을 5천원에 판매한다. 10냥이 많다 싶어도 나중에 환불이 되니 걱정없다. 빈 도시락과 엽전꾸러미를 들고 시장에 들어서면 '도시락카페 가맹점'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먹거리 점포와 여타의 가게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오전11시부터 오후5시까지인 도시락 타임에는 주로 가맹점들에 줄이 늘어선다.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TV에도 수차례 나온 기름떡볶이로, 얇은 밀떡을 간장과 설탕으로 양념해 기름에 볶아내는 옛 간식이다. 돈까스, 떡갈비, 마약김밥 등도 꾸준히 팔리는데, 가격은 거의 2냥, 1000원이다. 분식이 물린다면 반찬가게에 들러 김치나 동치미, 샐러드, 나물 등을 살 수도 있다. 평일 주 고객인 인근 직장인들은 아예 한 반찬가게를 정해놓고 엽전 예닐곱냥에 그날그날 달라지는 반찬들로 도시락을 채우기도 한다.

시장 골목을 누비며 도시락을 채우고 나면 중앙에 마련된 '도시락 카페'로 간다. 푸드코트처럼 펼쳐진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는데, 밥과 국(각 2냥)도 판매한다. 정수기, 전자렌지 등도 있고, 다 먹으면 음식물 쓰레기와 빈 도시락 통도 정리해 버릴 수 있다.

시장에는 먹거리 사이사이 작지만 알찬 점포들도 있다. 아기자기한 수공예품과 신발가게, 가방, 수선점 등이 곳곳에 숨어있어 눈길을 잡아끈다. 단지 먹고 가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체험이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장의 노력도 곳곳에 보인다. 김치만들기, 매실원액담그기, 천연화장품만들기, 공방DIY체험 등 시장 내 점포나 서촌 일대 공방, NGO, 생협 등과 손잡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친다.
▲ 기자가 채워본 통인시장 엽전도시락, 돈까스, 떡갈비, 콩국수 등 각 메뉴당 2냥씩 6종류, 총 6천원이 소요됐다. 5천원에 엽전 10냥과 빈 도시락을 제공한다.
특히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에 견학 온 학생들에게 인기만점인 통인시장. 통인시장 엽전이 인기를 끌다보니 여기저기에서 이 아이디어를 빌려가고 있다. 경북 문경은 전통찻사발축제에 상평통보 엽전을 만들어 축제 화폐로 썼는데, 5천원짜리 입장권을 구입하면 2천원에 해당하는 엽전을 주고 쓰도록 했더니 첫해인 2014년에는 3만개 중 무려 40%가 돌아오지 않았다.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거나 기념으로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란다.

경기도 수원도 화성행궁의 궁중의상 체험이나 장용영 갑주 체험에 엽전을 이용하고, 경북 청도박물관은 지역농민과 함께 하는 장터에서 구입 금액에 따라 체험엽전을 지급하기도 했다.

지방은 물론 외국의 시장에서까지 벤치마킹하러 오는 통인시장이지만 고민도 많다. 도시락 카페에서 나오는 수익은 카페 등의 운영비를 제외하면 그리 크지 않다는 것. 상인들은 "도시락 카페 고객들이 생필품 등 비먹거리 점포 이용은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시장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 같다"며 "소매시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비자 입장에서의 한계도 있다. 처음 왔다는 최재원·김선희 부부는 "아이디어는 좋고 재밌지만 먹거리가 분식 위주라 아쉬웠고, 현금으로도 살 수 있으니 다시 오면 굳이 엽전을 쓰지 않을 듯 하다"며 "동네 분위기나 엽전과 어울리는 호박죽이나 엿, 약과 같은 우리 전통의 먹거리가 더 있으면 외국인들에게도 우리 식문화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

통인시장은 시장 상인들이 머리를 맞대어 낸 아이디어가 전통시장 판도를 바꿔버린 성공사례다. 교과서에나 보던 옛 화폐가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 시장 및 축제의 효자아이템이 되는 '역사의 재발견'이다.

통인시장과 도보로 불과 1분도 안되는 거리엔 사직교당이 있다. 왁자지껄 생태교리이야기마당(왁생교당), 소태산마음학교, 길용선방 및 다양한 인권, 환경 관련 회의도 자주 개최되는 열린 교당으로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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