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습니다"

진주교당 학생회·청년회 창립

40여 년 〈원불교신문〉 열혈독자

교단의 재가출가 소통 창구 돼야



"흰구름 저 언덕 넘어 고향길목/ 삶의 큰집 // 그집 안마당엔 시방세계를/한 둥그렇게 밝히는/ 일원의 횃불."

한국시사문단작가협회 빈여백 동인시선집 〈봄의 손짓〉에 실린 '땅의 빛'의 일부다. 시를 쓴 사람은 '원불교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고 역설하는 경남교구 진주교당 공산 김법선(70·公山 金法船) 교도. 51세에 얻은 늦둥이 딸 김지안이 소태산청소년문학상을 8년 연속 수상하고 그 중 2회나 최우수상을 수상한 실력을 자랑하면서 그도 딸을 따라서 2011년, 64세에 등단하면서 시인이 됐다.

"늦둥이 딸을 포함해 아이 다섯은 모두 제가 최고로 존경하는 스승님이 오신 것입니다. 간절하게 올린 기도에 응답해 우리집에 오게 됐으니 지극히 감사하고, 사는 동안 늘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집안에 목탁 소리만 울려도 모두들 달려와 합장하고 같이 앉았다며 스승님이 오신 것이 틀림 없다고 믿고 있는 그는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대한다.

그는 진주교당 초기 교도로, 입교 52년의 세월은 진주교당의 역사와 같이 한다.

"고2 때, 규율부를 맡았는데 학생들과 충돌이 잦아 괴로워 종교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교도 4명의 허름한 진주교당이었어요. 장성진 법사님이 처처불상 사사불공 설법을 하시는데 귀에 쏙 들어와 다음 날 입교했습니다."

모두가 부처라는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는 그다. 규율부가 더 이상 괴롭지 않고 세상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원불교 전법자가 돼 진주고등학교 전학년 교실을 돌면서 교당에 오라는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주교당에서 학생회를 창립했고 졸업하면서 청년회를 창립했다. 당시 4~5명에 불과한 진주교당을 매주 30~40명의 학생들로 북적이도록 만들었던 열정의 흔적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부부교도가 여러 쌍 나올 정도로 20여 년 동안 활발했던 학생회, 청년회 출신 교도들이 지금은 각자의 교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삼창제지(주), (주)우리페이퍼 등 제지업 30여 년을 하면서 늘 회사 2층에 법당을 만들었다. 직원들과 공부도 하고 좌선과 기도를 일상으로 할 장소가 필요해서였다.

"30여 년을 사업하다보면 역경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피를 말리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회사 법당에서 법신불께 기도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기도하면 다 이뤄졌어요."

2004년 함양에서 제지공장을 할 때였다. 전기요금 팔백만 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새벽에 잠을 못자고 세 시간 동안 기도만 했는데 다음 날 낯선 사람이 팔백만 원을 현금으로 들고 와 물건을 주문하고 갔다. 경산에서 물어 물어 찾아왔다는 사람을 보면서 기도의 위력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그다.

그가 25세 때는 〈멸공전선〉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1972년 5월호에 '원불교 특집'을 실어 전국에 배포했다. 주로 군부대, 예비군부대, 경찰서, 기업이나 관공서 등에 배포하는 반공지에 느닷없이 '종교 순례'라는 타이틀을 넣어 교단을 홍보한 것이다.

"정확하게 몇 부나 배포됐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홍보에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든 크든 어떤 방식으로든 원불교를 알리고 싶었어요. 내가 부처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소식입니까!"
이처럼 일원의 소식에 목마른 갈증을 채워주는 역할이 그에게는 〈원불교신문〉이다. 그는 1972년 즈음부터 〈원불교신문〉을 보기 시작해 현재까지 40여 년간 열혈 독자다.

"처음에는 교당에서 봤어요. 초대 김정용 사장이었을 때는 순간지였고 80년대 이후에 주간지로 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산종법사 신년법문이 나올 때마다 줄 그어가면서 한 구절 한 구절 탐독했었습니다."

우연히 불국사에 갔을 때, 200여 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모인 설법 자리에서 주지 스님과 '본성 자리' 선문답을 주고 받았을 정도로 교리에 해박한 그에게 공부 비결을 물었다. 경전 공부도 중요하지만 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답이다.

"14면과 15면, 교리면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십이장경, 대종경 공부, 교리여행, 현대문명과 정전 등 다 좋습니다. 장오성, 원익선 교무님 등 필진이 좋아 신문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는 최근 '치바법인' 관련 기사를 유심히 봤다며 교단을 이끌어가는 등대 역할을 〈원불교신문〉이 적극적으로 해줄 것을 주문했다.
"불의에는 과감한 비판의 칼날이 있어야 해요. 공론화해야 대책이 섭니다. '남한강사건'도 그렇게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사드' 문제도 평화의 메시지가 전 세계로 뻗어가도록 선도해야 합니다."

그가 오래된 신문을 버리지 않고 누렇게 되도록 쌓아두는 이유다. 그는 요즘 컬러 사진이 많아 읽기가 훨씬 편해지고 점점 발전해가고 있다며 분발을 격려했다. 그는 신문이 교단의 소식을 알리는 데 그치지 말고 인물 대담이나 칼럼 등 살아있는 현장의 소통 창구가 돼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교단의 소통 창구, 그의 당부이자 창간 48주년을 맞는 〈원불교신문〉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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