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언제 올지 모를 님을 기다리다 돌이 됐다는 망부석은 설화든 실화든 한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미륵불이나 재림예수, 수운선생의 갱생을 고대하는 망부석 신앙인 역시 딱하긴 마찬가지다. 집집마다 동네마다 다시 올 구원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망부석이 즐비하다.

자신을 구원해줄 성자의 갱생을 고대하는 신앙인은 어디서 누가 깨달음을 얻었단 소릴 들으면 진위여부를 시험하려 든다. 수운 선생의 갱생을 기다리다, 소위 개종하여 찾아 온 제자는 주세성자 대종사에게서 이리저리 수운의 흔적을 찾는다. 대표적인 수운의 흔적찾기가 '이적'이다. 그 심중을 꿰뚫은 대종사는 '어디에' 의지하는 마음으로 믿지 말라 일침을 놓는다. '어디'란 '이적'이다. 새 주세성자의 대도정법은 인도상요법이라, 누구나 행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할 뿐, 신비나 이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망부석 신앙인 제자에겐 충분한 실망의 요소다. '이적'으로 법력을 재고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면 오류의 연속이다.

오랜 세월 수운 선생의 갱생을 기다리다 대종사를 만나 '기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다'던 제자의 환희심은 심히 위태롭다. 생자필멸이라 아무리 성자라도 생은 유한하니 고대하던 성자의 열반과 동시에 또 다시 망부석이다.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붙들고 매달린들, 이럴 줄 몰랐네, 속았네하고 땅을 쳐본들 소용없다. 성자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면 늘 성자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떠남에 대한 두려움이 반복된다. 유한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는 이유다.

성자의 부활로 구원받으려 함은 어리고 어둔 시대 신앙법이다. 어른된 참 신앙인은 성자의 갱생과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기가 깨침을 얻고 자기가 성자되어 구원한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중생이 깨쳐 성자가 되는 것이 순리다. 성인(成人)의 신앙이어야 성인(聖人)으로 인도한다.

사람만 믿지 말라는 또 다른 뜻은 중생의 소견과 변덕심 때문이다. 변덕쟁이 중생들의 그 환희심을 믿을 수 없다. 한눈에 반해 너 없인 못살겠다던 사랑의 유통기한, 허니문도 기껏해야 몇 개월이지, 슬슬 너땜에 못살겠다는 트집이 차고 넘친다. 좋다고 폴짝폴짝 뛰다가도 한순간에 맘에 드네 안 드네 시비하고 실망하고 돌아서기 일쑤다.

성자의 언행은 아무리 온전해도, 깨치지 못한 중생의 시각으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부처님 흉을 팔만사천가지나 끄집어내는 중생의 소견과 능력은 경이롭다. 사람의 언행은 보기 따라 각도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법이라, 사람만 믿지 말고 깨달음을 위해 밝힌 법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 법이 말씀이며, 후에 경전으로 남는다.

본의가 충분히 담긴 원각성존의 경전을 등불삼아 믿고 깨치고 행하기를 놓지 않으면 성자와 한자리에 있다. 스스로 수운 되고 예수 되고 미륵불 되어 살게 된다. 성자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성자의 자격증을 갖는다. 집집마다 망부석이 아닌 활불이 사는 참 낙원 용화회상이라, 세상을 제도하기 위해 성자가 따로 굳이 올 일이 없다.

은혜 망극한 대종사의 색신은 떠났고 모든 꽃다운 님은 간다. 님은 갔지만 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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