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큰 욕심으로 키울 것

재와 색의 욕심을 성불제중의 서원으로 돌리라




佛言- 財色之於人이 譬如小兒- 貪刀刃之蜜甛하야 不足一食之美요 然有截舌之患也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재물과 색을 탐하는 사람은 비컨대 어린 아이가 칼날에 묻은 꿀을 탐하는 것과 같나니 한 때도 족히 달게 먹을 것은 없고 도리어 혀를 끊을 염려가 있나니라."

〈사십이장경〉 22장의 말씀은 재와 색을 탐하는 것은 한때의 즐거움과 기쁨에 취할 수 있지만 욕망을 탐하다가 결국은 큰 재앙을 맞게 된다는 의미의 법문이다. 출가를 하는 것은 수행을 하고자 함이니, 수행자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세속적인 욕망을 끊고 성불제중의 큰 서원을 이루어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일체중생을 건지고자 함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수도인도 추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수도인도 싫어한다면 수도인과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수도인만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재와 색을 멀리하며 살라고 할 수 없다. 정당한 재산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은 남녀간의 사랑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며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재와 색은 수도인이건 보통사람이건 결국은 일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길도 어긋나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절제하지 않으면 화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비여소아(譬如小兒)란 '비유하건데 어린아이가'라는 뜻이다. 어린아이란 나이가 적은 아이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비이해와 인과에 대한 판단 능력이나 분별 능력이 부족한 한 사람, 즉 깊은 생각을 통해 판단하기보다는 본능에 따라 판단하고 움직이는 범부 중생을 의미한다.

탐도인지밀첨(貪刀刃之蜜甛)이란 '칼날에 묻은 달콤한 꿀을 탐한다'는 뜻이다. 칼날이란 언제든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 위험한 물건 위에 한방울 달콤한 꿀이 묻어있다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칼의 위험함을 아는 철든 사람이라면 상당한 고민을 하다가 그것을 몸이 다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조심히 취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욕망은 하지만 그것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칼의 위험성은 알고 있지만, 그 위에 있는 꿀의 달콤함을 물리칠 수 있는 절제력을 기대할 수 없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칼날에 묻은 꿀의 양이 얼마나 될 것인가? 단지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양에 불과하다. 조금만 생각한다면 한번 입에 넣고 즐기고 나면 그 즐거움이 끝날 것을 알 수 있는데 불같이 일어나는 탐욕의 마음을 절제하기란 죽기보다도 어려울 수도 있다.

재물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으므로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은 실로 막강하다. 요즘 언론에 회자되듯이 재벌들의 윤리에 어긋난 축재와 부정적인 방법으로 유산을 상속하다가 결국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천문학적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욕심을 내다가 결국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을 볼 때 재물에 대한 욕망도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중국의 사상가인 맹자는 '항유산 항유심(恒有産 恒有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백성들에게 적당한 재산과 생계수단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먹고 살 것이 풍족해야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래야만 태평한 세상이 된다고 가르쳤다. 재산이 풍부하면 생활도 윤택해지고, 그에 따라 마음도 넉넉해해지며 또한 어려운 사람이나 세상을 도울 마음이 날 수 있는 것이다.

색(色)이란 불교적인 시각에서 물질적 존재를 총칭하는 말이지만 흔히, 남자의 경우 여자의 경계를, 여자의 경우 남자의 경계를 말한다. 이는 색의 경계가 마음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은 음양의 진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성(異性)에 대해 마음이 동하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기 이전에 본능적인 욕구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라 할지라도 자행자지 한다면 세상의 지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수도하고 교화하는 사람들이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물과 총알이 되는 것은 곧 재와 색이라고 경계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을 억지로 없앤다고 없앨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대종경〉 수행품 36장)고 한 말씀이 재와 색에 대한 작은 욕심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큰 서원으로 돌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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