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구석기시대의 어디쯤에서 인간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자 하였고, 사람의 소리를 하늘에 전하고자 하였다. 부족을 이끄는 족장은 제사장이었고 무당이었으며 점성술사였고 연출가였다. 그는 부족원 중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골라 벽화를 그리게 하였고, 시를 짓게 했으며 춤을 연습시켰다. 동굴의 벽화가 완성되자 모두들 벽화 앞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시낭송을 하면서 한편의 연극을 올려 하늘과 사람을 연결했다. 태초의 종교는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을 만나면서 점차 발전했다. 세상의 모든 법회와 예배는 근본적으로 연극적이고 주술적인 종교의 형식인 것이다.

소태산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이 일을 어찌할꼬'를 보았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극에다 종교극이니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종교적 엄숙함이 흐르는 연극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지루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윤택 연출에다 연희단 거리패의 작품이라고 하여 일말의 기대를 가지긴 했었다.

막이 오르기 전의 무대는 단출했다. 일원상을 본 뜬 동그라미 형태의 무대에 화면 하나만 달랑 매달린 배경을 보고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역시 이윤택이었고 연희단 거리패였다. 막이 오르자마자 모든 우려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연극에 빨려들고 말았다. 소태산의 생애를 십상의 내용으로 쉽게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전개가 역시 거장의 솜씨다웠다.

서양의 정통 무대극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애환이 숨결처럼 스며든 구음, 정가, 판소리의 형식을 두루 섞은 마당극으로 극이 전개되니, 무대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서 좋았다. 정가가 극을 끌어갈 때는 온 우주에 몸을 싣는 어린 소태산의 고행이 펼쳐지고, 구음이 나올 때에는 온몸에 피고름이 돋는 고행을 할 때이며 마당놀이가 펼쳐질 때에는 방언 공사를 끝낸 뒤의 축제를 표현할 때였다. 무대의 배경은 그림자극의 형식을 채용하여 자잘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연극의 내용과 형식이 적재적소에 딱딱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성가의 가창실력과 가사의 수준도 중층적으로 겹치고 겹쳐 일정한 높이의 수준을 고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물들도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게 배역을 정했는지, 소태산 역할의 이원희를 보고는 대종사님이 현현하신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바랭이네와 황이천은 연극을 끌어가는 조연으로서 최고의 캐릭터였고 연기를 보여주었다. 바랭이네가 연극을 이끌어가는 조연 역할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태산을 위대한 교조로 모시고 싶은 갸륵한 뜻에서 나온 마음일 터. 하지만 흠결 없이 어찌 인류사에 빛나는 위대함을 성취하겠는가. 바랭이네가 빠진다면 '이 일을 어찌할꼬'는 앙꼬 없는 찐빵이 되어 참으로 맛없는 맹탕 서사극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꼬'는 백 년 전의 시대정신이 백 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소태산의 시대정신과 이윤택의 시대정신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져 있기에 가능한 연극적 법회였다.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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