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과 적공으로 가족교화 해냈습니다"

'교무님 말씀 토달지 않아야 참 교도' 약속 지켜

엄마같은 교도회장…단 하나의 서원은 우리교당



인생의 위기는 40대에 갓 들어섰을 때 닥쳤다. 남편의 잇단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고, 중곡동 집까지도 내놓고 당시 외곽이던 거여동까지 밀려나야했다. 집안에 사람 두고 자랐던 부잣집 딸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종교에 기대볼까하다 예전 집 앞 성당이 생각났다. 일요일 이른 아침, 그는 옛 동네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집에 돌아온 그는 허겁지겁 〈원불교교전〉부터 찾아 읽었다. 한 장 한 장 감탄하고 아껴서 읽느라 그 밤을 꼬박 샜다. 어스름 새벽빛이 걷힌 아침, 그는 이미 교도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당 찾으러 갔다가 원불교인이 되어 돌아온 성동교당 선타원 박경선(善陀圓 朴敬善) 교도. '세수하러 갔다가 물 마시고 온' 옹달샘의 토끼같은 그의 이 사연은 주변 인연들에게 회자된다. 원기65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에 앞서 원기61년에 어머니(유정명화·구로교당 창립주)와 동생(구로교당 박이순 교도)이 입교를 권하며 교전을 줬어요. 그런데도 다른 친구가 준 성경책만 읽어봤지요. 당시에는 '종교가 왜 필요해?'하는 마음이었거든요. 그러니 힘들어지자 성당으로 간거죠."

그렇게 성당에 들어서자 갑자기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 때 든 생각이 '나한테 무슨 종교야, 그냥 살지'였다. 그러고는 돌아나오는데, 왠일인지 안가본 길로 가보고 싶었다.

"두고두고 그게 참 인연인 것 같아요. 그 동네서 살았는데도 낯선 길이 있더라고요. 걷다보니 한 가정집에 동그라미가 있는데, 왠지 끌려서 한바퀴를 돌아봤더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해요. 무슨 용기인지 문열고 들어가 신발장 앞에 앉아서 왠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요."

특이한 옷을 입은 할머니(김조현 교무)가 하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와 정신이 깨는 느낌이었다. 목탁을 치는데도 마음이 편해면서 그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던 사이 법회가 끝나고, 그는 허둥지둥 신발을 꿰어차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뒤에서 저를 끌어안아 돌려세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오셨어요' 하시길래 할 말이 없어 '그냥 왔어요' 했지요. 저를 방으로 데려가 요인들 있는데 앉히시고는 이것저것 묻는데, 사업 실패며 괴로움이며 줄줄 나오더라고요. 거기가 원불교인줄도 그때 알았어요."

집에 돌아온 그가 교전을 찾은 건 당연지사, 어찌나 좋았던지 당장 다음날부터 딸들 방 문까지 열어놓고 큰 소리로 읽었다. 일주일째 되니, 안듣는 줄 알았던 남편(김도찬 교도)이 딸들에게 "니들도 엄마따라 원불교 가보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큰 딸 대희와 작은 딸 영민이까지 셋이서 일요일마다 결석도 지각도 없이 3년을 다녔더니,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이 양복입고 스윽 나와요. '나도 오늘 교당에 가겠소'라면서요."

그렇게 일원가정이 된 그는 일찌감치 교당의 주인으로 우뚝 선다. 입교한지 3개월만에 봉공회장을 맡고 이후 요인으로 살아온 세월, 당시 서울교구 교리강습회에서 김일상 교무가 "참다운 교도는 교무님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다"는 말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 덕이다.

"교무님이 가라셔서 교구가서 봉공분과장도 맡고, 서울봉공의 큰 어른이신 홍인덕님 추천으로 삼삼회에도 들었어요. 이후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종로교당, 역촌교당 거쳐 지금 성동교당으로 올 때까지 교무님 말씀 잘 지키려고 노력한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런 그의 나없고 사심없는 신앙생활을 가족들에게 먼저 감동을 줬다. 신심을 특히 물려받은 둘째딸은 박 교도가 서울교구 봉공활동을 할 때 '나만큼이나 팔 걷어붙이고 같이 했고', 온 가족이 교당에 나와 대를 이어 주인으로 살고 있다.

"그래도 성동교당 교도회장직이 오니 고민이 많았어요. 교도회장은 경제적으로 뒷받침도 돼야 하는데 저는 자격이 안된다 싶었죠. 그래서 김덕수 교무님께 여쭈니 '신심을 보고 맡기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물질로 희사는 못해도, 엄마같은 회장은 할 수 있겠다 싶어 열심히 6년을 살았네요."

집보다 교당이 편하고,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박경선 교도. 그는 와병중이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열반했을 때도, 그 자신이 신장암으로 신장 하나를 떼어내면서도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도로 살아왔다. 성동교당 교도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기도하는 매일, 욕심없이 맑고 밝게 살아가는 그에게 꼭 이루고픈 서원이 하나 있다.

"교도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교당 갖는 게 서원이에요. 예전부터 나도 잘살게 되면 교당 짓는데 불사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참 마음이 남거든요. 헌공금도 조금씩 밖에 못내지만 기도와 신앙만큼은 간절히 하고 있어요."

인터뷰 내내 "어려운 살림에도 한 가족같이 함께 해주는 교도들 보면 미안하고도 고맙다"고 말하는 박경선 교도. 투병 중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의 서원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도해본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