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독경은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새기고, 몸으로 실천하기 위한 신앙 행위이다.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어떠한 형태든 경전 읽는 것을 집단과 개인의 신앙의례로 삼았다. 직접 들을 수 없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성현이 여기에 살아 계심을 확인하고, 그분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방법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독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심으로 보지 않으면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미 언급했지만, 장자의 윤편(輪扁, 수레바퀴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편이라는 사람) 이야기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제 나라 환공에게, 윤편은 지금 읽고 있는 경전은 옛 사람의 찌꺼기라고 한다. 그 이유를 대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환공에게 그는 수레의 굴대 만드는 일에 비유한다. 너무 가늘게 깎으면 구멍이 헐거워 튼튼하지 못하고, 굵게 깎으면 구멍에 꽉 끼어 수레가 굴러가지 못한다. 그 핵심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해 늙어서도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성현들 또한 그 깨달은 내용은 글로써는 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글자를 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찾는 체독(體讀)이 되어야 한다.

다음은 경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독경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운곡을 맞추고 의례작법까지 갖추게 되었다. 수백 수천 명이 독경하는 장면은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장엄하다. 재현된 신성한 언어는 내 심금을 울리고, 성스러운 시공간을 확대해 간다. 그 말씀은 만트라(眞言, 진리의 말씀)가 되어 자신을 우주적 불신(佛身)에 맡기게 된다. 독경은 염불처럼 어떤 수행보다도 강렬한 신비체험을 가져다준다.

마지막으로 경과 자신이 일치되는 삶의 독경이다. 이제는 경전의 말씀이 삶이 되는 것이다. 몸으로써 경전을 쓰는 것이다. 몸의 사경이다. 사경은 한 말씀 한 말씀을 성현의 분신으로 보는 공경함을 근본으로 한다. 예전에는 연화대를 밑받침으로 놓고, 그 위에 경문 한자씩을 쓰는 사경도 있었다. 글자를 불신으로 본 것이다. 몸의 독경은 경전의 말씀과 뜻을 자신과 일치시키는 부처의 행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믿음과 수행의 극치이다.

색독(色讀)은 몸으로 경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 일련종의 종조인 니치렌(日蓮)은 스스로 〈법화경〉을 평생 색독했다고 한다. 색독은 원래 경의 표면적인 뜻만 훑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심화시켜, 바른 해석을 기반으로 실천하는 데에까지 이른 것이다. 경전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경지까지 나아가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색독은 삶 자체가 곧 경전의 해석이 된 것이다. 시대와 근기에 맞게 해석되어 자신의 삶을 인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산종사의 독경해액(讀經解厄)의 말씀처럼 '동정 간 모든 경계를 따라 염두에 항상 읽는 경, 우리의 목전에 그 공덕이 나타나게 하는 독경, 저신저골(貯身貯骨, 몸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것)하는 독경, 시방 세계의 묵은 재액을 점차 소멸하고 신천지 신인간이 되는 독경'이 바로 궁극의 독경이다. 이럴 때, 우리의 뼈는 신앙이 되고 살은 수행이 되며, 경은 부처가 되고 평상심은 도가 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