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큰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늘 뵙고 싶어

▲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대산종사는 큰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그 속마음을 아셨는지 대산종사는 '나를 아버지라고 해라'한 말씀이 평생 기억에 남았다.
- 어릴 적 외할머니 손잡고 다닌 원불교…교리실천도해 프린트본 읽은 후 출가 결심해

- 일생 가운데 대산종사 모실 때가 제일 행복해…법문 받들며 사대불이신심 발심 생겨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새 회상과 인연은 지중했다.
교당과 〈불교정전〉, 그리고 큰 스승을 곁에서 아버지 같이 모셔왔던 삶은 백산 이용정(70·白山 李龍定) 원로교무에게 영생의 보물이 됐다.

원불교 만남과 출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부산에 있는 큰 이모댁에 놀러갔다가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부산 초량교당에 나가게 됐다. 그때 향타원 박은국 종사를 처음 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다시 금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 이모에게 <불교정전>을 얻어왔다.

충남 금산에도 원불교가 있는지 살펴보니 어느 산모퉁이에 조그마한 기와집이 교당인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즈음이다. 당시 박영권 교무가 주재했을 때 찾아 뵙고 일요일마다 어른들 틈에 끼여 법회를 봤다. 그 어린 나이에 교당에 열심히 나오니 어른들은 얼마나 이뻐했을까. 교무는 물론 교도들 모두 참으로 기특하기만 했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 금산교당에는 현 대구교구장 김도심 교무가 간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도 출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원불교는 널리 알려진 게 아니어서 어머니와 주위 사람들은 '스님 생활한다'고 알아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처음 교리실천도해 프린트본을 받고서 원불교 교리의 우수성을 깨닫고 출가를 단행했다.

ROTC와 천도재

전생부터 이어온 깊은 불연 때문인지 대산종사를 한눈에 알아본 그는 언제부터인지 남모르게 흠모해왔다.

"처음에 월간 〈원광〉을 고등학교 때 봤는데, 그때 대산종사님 진영이 나와 처음 뵈었지. 그때 이 어른이 부처님이다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원광대학교를 다닐 때 대산종사를 몇 차례 뵈니까 성안 그대로 부처님이었지."

지금은 원불교학과이지만 당시에는 불교교육과였다. 2년을 다니고 ROTC 8기에 지원했다. 장교생활은 강원도 양구의 중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제21보병사단에 근무했다. 그때도 <원불교교전>을 즐겨읽으며, 주위 동료들에게 법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미로 살았다.

"화기 소대장으로 갔는데 어느 날 대대장이 재를 지내야 되겠다고 해서 재 지낼 사람 있냐고 물어봐. 그때 어느 장병이'우리 소대장님이 원불교 믿는다'고 나보고 재를 지내자고 그러는 거야. 그 이후부터 재 지낼 일만 있으면 나를 찾았지. 그때 원불교가 있다는 게 군부대에 다 퍼졌어."

당시에 사건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군대 안전을 위한 재를 모시곤 했을 때였다. 그는 천도재를 올리면서 본의 아니게 군교화를 펼치게 된 것이다.

아버지라고 해라

그가 제대할 때 신도안에 대산종사가 주재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대산종사에게 군복 입은 채로 인사드리니 따뜻하게 손을 잡았다.
"손을 잡으신 채로 '나랑 10년 같이 살자'고 하시더라고. 무슨 말씀인 줄도 모르고 그냥 '예 그러겠습니다'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10년도 10년이고, 20년도 10년이었던 것이지."

그렇게 해서 법무실 주사로 바로 근무했다. 장교생활로 몸에 익은 그에게 숙소청소, 군불때기 등의 잡다한 일이 어색했지만 부처님 모시는 일이라 행복하기만 했다. 때로는 두부를 만들어서 시장에서 두부장사도 했다.

"어느 날 대산종사께서 '누가 뭐라고 물으면 나를 아버지라고 해라'고 하시는 거야. 가슴이 울렸지. 큰어른 모시는데 당신을 '아버님으로 모시라'고 하시는데. 나를 아들로 생각하시는구나 하면서 심법이 다르시다는 것을 알았지. 그때부터 마음이 더 챙겨졌어."

대산종사의 자비로운 심법에 감명받은 탓일까. 극진히 잘 모셔야겠다는 게 실수가 된 일이 벌어졌다.

"처음 불을 땔 때에 '장작 5개만 때라'고 일러 주셔. 근데 내가 보기에 그날이 추울 것 같아. 그래서 1개를 더 넣었지. 그 다음날 물으셔. '5개 땠냐?' 1개 더 넣었다고 말씀드리니까 '야야. 시키는 대로 해라. 더 넣으니까 방이 뜨겁더라'고 하시는 거야."

당시 군불을 지필 때 가늠이 없었던 그에게 대산종사는 장작 갯수를 알려줬지만 '더 생각하는 마음'이 스승의 지도를 따르지 않게 만든 꼴이 되어버렸다. 이를 깨닫게 된 그는 그 뒤로 대산종사님 말씀대로 꼭 그대로 했다.
▲ 대산종사와 만남, 그리고 출가로 인도한 〈불교정전〉
대산종사 시봉이야기

대산종사를 곁에서 20년간 시봉한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대산종사께서는 필기도구를 항상 머리 맡에 두고 자라고 하셨어. 어느 날은 저녁 11시쯤되니까 '야야 법문 좀 적어라'하고 깨우셔. 그때 법문을 들은 그대로 받아 적으면 정말 고칠 것 하나도 없었지. 닭이 온전한 달걀 낳듯이 얼마나 연마하고 연마하셨는지. 나중에 손댈 것이 거의 없었지."

대산종사를 모실 때 이렇게 그대로 받아적은 법문들 가운데 '삼학공부 기(基) 1~5'가 있었다. 이런 기연으로 소태산 대종사가 낸 교법이 전무후무한 법이며 최상의 법이라는 신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일생 가운데 제일 행복스러울 때가 대산종사를 모시고 살았던 때지. 어른을 모시고 받들고 생활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 속에서 살다보니 소태산 대종사님이 주세불이신 것을 확실히 알게 됐어."

1924년 갑자년을 기점으로 선후천 교역기가 도래했다는 점, 석가모니 부처님은 선천시대 첫 성인이며 수운대신사와 증산천사는 선천시대 말 성인이라는 점, 우리 회상이 드러나는대로 수운대신사와 증산천사도 드러나게 된다는 점, 후천시대 시작으로 성주괴공을 다 맡은 성인이 소태산 대종사라는 점, 새 회상 교운은 한량없다는 점, 한국이 과거에는 중국에 조공을 많이 했지만 앞으로는 중국을 포함해 12제국이 조공을 바치러 온다는 점 등 대산종사를 모시며 문답한 내용을 소개했다.

지중한 인연

이후 그는 교당으로 발령받아 교화를 시작하면서 가스흡입사고를 당하는 불운이 따랐다. 그가 퇴임할 때까지 용암교당에서 몸을 추스렸던 때, 그 누구보다 대산종사 생각이 간절하기만 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초등학생때부터 '누가 나를 가르쳐줄 분이 계셨으면 참 좋겠다'고 늘 생각을 했지. 대산종사를 만날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늘 마음에 어떤 분이 나를 가르칠 분이 계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그러다가 대산종사를 모시게 됐고, 또 아버님으로 모시고…."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용암에서 몸이 불편할 때도 한번씩 뵈었는데, 대산종사가 열반한 뒤로는 더 이상 찾아뵐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다 그렇게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교무들도 대산종사를 뵈면 그동안 어렵고 힘든 마음이 다 녹는다 그래."

그는 대산종사를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마다 꺼내 되새기는 '성경신(誠敬信)' 법문도 소개했다.

"늘 한결같이 정성하고 진실한 마음, 늘 한결같이 공경하고 조심하는 마음, 늘 한결같이 법 받아서 실천하고 가르치는 마음. 이것을 전성·후성(前聖·後聖)이 전하는 심법이라 하셨지. 나도 이 심법으로 살아야겠다며 살아왔어."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대산종사 유훈을 소개하는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간절한 서원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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