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여성들이 자연에서 터득한 지혜로 시작돼

-남성들만 제일이라는 사고방식…이제 사라져야

▲ 여도언 교도/해운대교당
우리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 동이(東夷)족의 큰 어른 신농씨가 부족을 이끌고 농경생활에 정착할 수 있었던 행운은 순전히 여자들 은덕이었다. 여자들이 자연에서 터득한 지혜 때문이었다.

농사를 모르던 아득히 먼 옛날 털북숭이 남자들은 움막집을 떠나 며칠씩 사냥에 나섰다. 가족에게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하기 위해 창과 도끼를 들고 길짐승을 잡으러 다녔다. 그 시각 여자들은 바구니를 둘러메고 들판으로 나가 과일과 곡식을 찾아 헤맸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먹을거리 채집이지만 가족을 위한 일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씨앗이 떨어진 곳에서 싹이 트고 가지가 뻗어 꽃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이치를 발견했다. 주워온 씨앗을 마을 주변에 심었고 열매가 익으면 양식으로 사용했다. 남은 것은 저장하여 긴 겨울을 대비했다. 먹을거리에 여유가 생기자 남자들은 여자들의 지혜를 높이 받들었다. 힘은 약하지만 지혜는 자기들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했다. 여자를 칭송하는 소리가 마을마다 자자해졌다.

남자들이 자기네가 농사지어 보겠다고 나섰다. 농사가 사냥보다 많이 수월해 보인 것이다. 힘 센 남자들이 더 많은 땅을 일구어 농사 지으니 소출이 늘어났다. 먹고 사는데 여유가 생기자 여자들의 역할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남자들이 모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주장을 하거나 의견을 내면 남자들이 우습게 여기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다른 종족과 외교와 국방, 합력 문제가 거론될 때는 따돌림이 점차 다반사가 되었다. 여자에게 유리천장이 씌워지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이를 당연한 일로 수용해 갔다.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화창한 날 한 노인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세먼지가 없어서 햇빛이 눈부시게 맑았던 초여름 오후 그는 1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뛸 듯이 좋아했다. 딸들도 오랜만에 그의 집을 찾았다. 자동차를 외제차로 바꾸자는 의견이 이구동음으로 먼저 나왔다. 김치냉장고와 공기청정기도 가장 큰 최신 모델로 들여놓자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TV만 보고 있었다. 아들이 아닌 딸이 당첨금을 챙겨갈까 그게 걱정될 뿐이었다.

그날 저녁 TV에서 남북관계에 평화무드가 조성되어 개성공단이 재가동에 곧 들어가고, 이산가족 상봉 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이 터져 나왔다. 금강산과 함께 평양과 개성의 시내관광이 연내 시작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를 한층 들뜨게 만든 뉴스가 뒤이어 나왔다. 높은 혈압과 약해진 관절을 획기적으로 정상화하는 신약이 국내 대학과 벤처기업의 5년간 공동연구로 개발되었다는 기자의 멘트였다. 가족들과 함께 꼭 해보고 싶었던 개성관광을 도보로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약해진 관절 때문에 포기하고 있던 개성관광을 거뜬히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뉴스가 끝나자 그의 관심은 곧장 10억 원의 행방에 꽂혔다.

그는 이 모든 행복을 얼마만큼 느끼고 있으며, 언제까지 가져갈까. 그는 사실 유쾌하고 행복한 느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일선물을 받거나 또는 동호회에서 축하선물을 줘도 고맙다는 감정을 표출할 줄 몰랐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금 과장된 제스처를 쓰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시큰둥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에게 원하는 물품이 주어져 만족감을 가졌겠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그는 행복이나 기쁨을 조금도 오래 가져가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그를 두고 감정표현에 서툰 내성적 성격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었다. 이웃들은 그러나 그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아집과 배타, 변명에 익숙한 사람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남자들만의 장소에서 전쟁이야기를 하던 남자들이 여자통역관을 발견했다. "이 곳에 왜 여자가 있느냐. 여자는 나가라"고 소리치자 곁에 있던 한 여성이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선 여비서는 상사의 지시를 무조건 따른다오." 듣고 있던 탁월한 언어능력자인 여자통역관 원더우먼이 받아쳤다. "우리 고장에선 그런 사람을 노예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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