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 여성 유일 창립발기인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9년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을 가질 때 7인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오타원 이청춘 대봉도. 당시 자신이 가진 사재를 털어 익산 총부 건설과 전주지방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조명을 받지 못했던 오타원 선진을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월간원광사 장지해 교무가 그 생애를 밝혔다.

오타원 선진은 1886년 전북 전주에서 3녀 중 셋째로 출생한다. 어릴 적 기상은 퍽 활달하고 다정다감했지만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함에 따라 젊은 시절 한동안 기녀생활을 했다. 슬하에 자녀가 없고 외롭게 살아온 탓에 출가 이전의 삶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의 연원으로 대종사를 뵙고 환희 용약하여 제자가 되니 당시 오타원 선진의 나이가 38세였다.

장 교무는 "오타원 선진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원기9년의 익산시대는 더 많은 이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교단의 외형을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시기였다"면서 "그때 여성 유일의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평생을 티끌만한 사심도 없이 모두 바친 그의 정성과 오롯한 신성, 참된 믿음 뒤에는 그를 알아본 소태산 대종사의 너른 품과 인본주의 정신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타원 선진은 비록 젊은 시절 굴곡이 많은 삶이었다. 출가한 이후로는 교단에 정신·육신·물질을 온통 다 바친 오롯한 생애를 살았다. 장 교무는 "용모가 단정하고 성격은 명량 쾌활했으며 이론에 밝고 언변이 좋아 좌담석상에서는 웅변가라 불릴 만큼 평이 좋았다"고 밝혔다. 또한 원기10년에는 입교기념으로 자신이 가진 토지 전부를 교단에 희사할 만큼 대범하고 공심이 많았으며, 원기11년 2월 출가하면서는 모친과 함께 총부 구내로 이사해 세속 생활을 청산했다.

오타원 선진의 출가 초반의 삶에 대해 장 교무는 "공부방면으로 많은 취미가 있어 법문 듣기를 좋아했고, 소태산 대종사가 영광으로 가면 영광, 만덕산으로 가면 만덕산으로 따라다니며 입선과 청법하는 데에도 정성을 들였다"고 전했다. 즉, 불법연구회에 입회한 이후로는 전일의 화려한 삶을 모두 놓아버리고 절약검박한 모습으로 수양에 오롯이 정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장 교무는 "오타원 선진은 1대1회 기념총회(원기13년 3월) 당시 예비특신부 60인에 이름을 올려, 교단에서 처음으로 엄숙한 장엄을 갖춰 진행한 승급예식에 참예하게 됐다"며 초기 교단의 중요 유공인이자 적공인으로서의 면모를 밝혔다.

이어 오타원 선진의 생애 중에 상징적으로 손꼽을 만한 세 가지 활동에 대해 발표했다. 첫째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으로서 유일한 여성이었다는 것, 둘째 중앙총부 유지건설의 공덕주였다는 것, 셋째 자신의 고향인 전주지역에 본격적인 교화활동을 연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타원 선진이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경제적 혹은 사업방면의 안목이 탁월했고, 이를 소태산 대종사가 알아보았다"고 추측했다.

원기9년 창립총회 후 대종사가 상조조합을 신설하고 각종 자금의 저축제도를 마련해 토지매입과 작농, 양잠, 과원을 하면서 경제기반을 마련해 가는데 당시 오타원 선진의 제안으로 공동양잠을 시작한 데에도 그 근거를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장 교무는 "오타원 선진은 정규학습을 밟지 않았음에도 학식과 문예 등에 소질이 뛰어난 종합 예능인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두 번째 중앙총부 유지건설에 큰 공덕을 끼친 부분에 대해 장 교무는 "오타원 선진이 교단에 희사한 토지의 규모가 논 70여 두락(1만4천여 평)이다. 이는 전주 소재의 유지답이었다"고 전했다.

마지막 전주교화에 대해 장 교무는 "원기20년, 오타원 선진은 자신의 고향인 전주지역에 본격적인 교화를 하기로 서원하고 남은 재산을 전부 털어 전주 노송동에 가옥을 마련하고 '불법연구회 전주회관'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이로서 전주교당이 탄생했다"고 발표하며 혈심혈성으로 교화에 전념한 오타원 선진의 삶을 '기쁨, 희열, 충만'의 생애라고 평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