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현 교무/은덕문화원
전쟁 패전국 독일과 일본, 과거사 인정 차이 달라
사드, 긴박해지는 한반도…세계평화 내부에서 준비해가야



쾰른교당 창립10주년에 찾은 독일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다. 수도 베를린에는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 추모관이 있다. 2711개의 상징석관이 내리꽂힌다. 숙연하다. 피터 아이젠만의 상징은 모든 폐쇄된 질서, 닫힌 체계는 실패한다는 메시지를 교육시킨다, 독일인의 과거사는 참회헌정사다. 진정성이 있다.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 역사 앞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간절했다. 그래서 그들이 있는 유럽연합의 미래는 열려있다. 독일과 같은 패전국 일본, 그들은 27일 국무회의에서 위안부 강제동원 국립공문서 존재사실을 최초로 인정했다. 위안부 동상 철거, 망언으로 얼룩진 72년만의 결과다. 역시나 가장 중요한 전쟁피해자를 향한 용서는 닫혀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판단기준이다. 그것은 자각의 나침판이다. 당면과제에 대한 방향제시다. 그것이 작동되지 못하면 모든 행위는 믿음을 잃는다. 과거의 성찰과 반성은 그래서 절실하다. 모든 행위의 원천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미래로의 질적 변화인 것이다. '홀로코스트' 역사 앞의 독일과 '위안부' 역사 앞의 일본은 과거사 인식에 치명적인 차이를 보였다. 그들의 행동은 적나라하게 엇갈렸다. 소태산 대종사는 "나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낙원을 얻을 것이다"고 하셨다. 부끄럽다. 우리의 72년사에 용서를 꽃피울 봄날은 주어지지 못했다.

국가사회는 과거에 대한 자동기억장치가 없다. 루이지 삐란델로는 '사실은 빈 자루와 같아 홀로설 수 없다'고 한다. 국가 사회적 차원의 과거는 반복적 재생을 요청한다. 이 길이 국가사회 핵심가치의 구원, 즉 원천에의 활력이다. 한 사회 역사인식의 재구성은 그렇게 시대가치로 되살아난다. 고로 역사인식은 미래가치다. 양국의 리더십과 과거사 인식이 모두 중요한 이유다. 그들과 나, 그리고 우리의 공통과제다. 그래서 정산종사는 역사의 진면목을 비치는 거울을 잘 활용하라하셨다. 역사는 그 시기의 대세, 그 주인의 심경, 그 법도의 조직, 그 경로의 해득 전체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 시대, 회상, 미래, 성자관이 구체화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과거사는 아직도 주인을 기다린다. 아시아의 무질서를 흔들어 바로세울 자동기억 생산의 주체. 미래존재로의 우리다.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재판 대상국이다. 독일의 '뉘른베르크재판'(Nuremberg Trials)과 일본의 '도쿄(東京) 재판도 늘 비교 재생산해야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5년 11월에 시작되어 403회를 기록했다. 전쟁의 공모와 참가, 계획, 실행의 죄,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 등 항목별 실형은 지금도 책임을 묻는다. 전쟁에 대한 분노와 반성, 결별이 피해자와 가해자간 시공을 넘나들게 학습시킨다. 인연과보의 법문설법장이다.

도쿄 재판은 이치가야 일본 방위성 육군강당에서 진행됐다. 1945년 8월 15일 재판정 마련, 46년 5월 개정, 48년 11월 판정이었다. A급 전범 도조 히데오를 비롯한 28명중 7명만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현재 그곳은 도발적이고 대담한 일본전쟁전시물 진열장이다. 피해국민들을 향한 간절한 용서자세는 감지할 수 없다. 이후 미소냉전 체제에서 일본은 소련 방어기지로 부각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판단에서 우리역사는 절대적으로 단호하지 못했다. 오늘 날까지 한국사의 굴곡과 파란은 연장선상에 있다. 그 핵심에 사드갈등도 있다. 아직도 동북아정세는 우리가 소외된 밀림 속 이권다툼장이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한국은 안중에도 없다. 얕잡아 본다. 우리는 비장함과 긴박함으로 문제 중심에 서야한다. 내분을 겪을 여유가 없다. 결국 자력을 키우지 못한 과도한 의존은 존재감 소멸을 부른다. 국가의 자력양성만이 우리역사를 당당하게 진전시킬 길이다.

역사는 예측하기 힘들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그 예다. 우리의 3.8선이 세계평화의 기념장이 될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소태산 대종사는 한국이 장차 어변성룡(魚變成龍)이 되리라 전망했다. 전광석화처럼 그 말씀을 극적으로 전개할 힘은 우리들의 역량이다. 국가와 교단의 장래가 의지와 전략으로 장엄되고 꿈틀대는 주체로 화하는 길에서 우리를 확인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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