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중생이 윤회하는 이유는 탐·진·치 때문이다
맑은 물을 휘저으면 어떤형상도 비추지 못한다



佛言 - 愛欲之於人이 猶執炬火逆風而行이라 愚者는 不釋炬하고 必有燒手之患이요. 貪媱怒愚癡之毒이 處在人身하야 不早以道로 除斯禍者는 必有危殃이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애욕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비컨대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려 가는 것과 같나니, 어리석은 사람은 그 횃불을 놓지 아니하고 스스로 손을 태우는 환(患)이 있을 것이요 애욕이 많은 사람은 그 착심을 놓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 몸을 멸하는 환이 있으리라."


〈사십이장경〉 25장의 말씀은 애욕에 대한 착심을 떼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큰 재앙이 된다는 의미의 법문이다.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데는 횃불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람이 내 앞으로 불어와 횃불이 나를 향해서 일렁이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몸이 다치지 않도록 잠깐 끈다든지 아니면 횃불에 한쪽으로 비켜서 들 것이다. 그러나 애욕에 한번 빠지게 되면 횃불이 내 손이나 몸을 태울지라도 다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설혹 다치는 줄 알면서도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아서 스스로를 재앙에 빠뜨리게 된다.

유집거화역풍이행(猶執炬火逆風而行)이란 오히려 횃불을 잡고 바람을 거슬려 간다는 말씀으로 애욕에 한번 맛을 들이면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려 가는 것처럼 위험할 지라도 멈추려고 생각하지 않고 나아간다는 뜻이다.

필유소수지환(必有燒手之患)은 반드시 손을 태우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어리석은 중생은 몸을 상할지언정 애욕을 놓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손에 잡은 횃불로 몸을 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탐요에노우치지독 처재인신(貪媱怒愚癡之毒 處在人身)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탐하고, 불같이 성을 내며, 시비를 모르는 우(愚)와 알기는 하나 염치없고 예의 없는 치(癡)의 어리석음의 독은 사람의 몸에 있다는 말씀이다. 중생은 삼독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재앙을 면하지 못한다.

부조이도 제사화자 필유위앙(不早以道 除斯禍者 必有危殃)은 도로써 일찍이 그 화근을 제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위험한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통해 공부하고 보은하는 생활이 몸에 배이게 되면 죄를 짓는 일과 남을 해하는 일을 자연히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본능의 지배를 받으면 결국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동안 공부한 〈사십이장경〉 내용 중 애욕과 색에 대해 말씀은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비유담들이 많다. 16장에서는 애욕으로 인해서 마음이 탁하게 되는 것이 마치 맑은 물을 손으로 휘 저으면 물이 어떤 형상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고, 22장에서는 재색에 대한 욕구는 마치 날카로운 칼끝에 묻은 꿀을 먹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하셨다. 23장에서는 처자와 가정에 얽매이는 것이 풀려나올 기약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며, 24장은 애욕이 하나이기에 망정이지 둘이었으면 세상에 도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씀까지 하시면서 애욕을 경계하셨다.

〈원불교 교전〉에 포함된 불조요경에는 〈금강경〉을 비롯한 6종의 부처님 경전과 〈수심결〉등 3종의 조사들의 논(論)이 실려있다. 불조요경에 실린 9종의 경론을 보면 직접적으로 애욕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이나 이성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유독 이런 내용이 실려있는 〈사십이장경〉을 왜 불조요경중 하나로 채택하셨을까? 교단 초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출가 제자들이 반드시 알고 실천해야 할 기초적인 마음 자세와 재색명리에 대한 계문 등이 수록되어 가르치기 적당한 법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중생이 윤회를 하는 이유는 탐·진·치 삼독심 때문이고, 이 중에서 탐심이 가장 강하며 탐심 중에서 애욕(이성에 대한 욕망)이 제일 물리치기 어렵다고 한다. 왜냐면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손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고, 동물들도 더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짝을 찾아 구애하고 새끼를 낳아 후대에 자신의 DNA를 유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도인 일지라도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동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소태산 대종사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성적인 본능을 무조건 참고 멀리하기위해 일생을 깊은 산속으로 피하거나 자신을 해하면서까지 본능을 억누르는 수행을 하기 보다는 애욕으로 향하는 착심을 돌려 중생제도의 큰 서원을 이루는데 노력하라 했다. 나의 성적인 에너지를 억지로 누르고 수도하는 것도 성스러움을 지키는 일이지만 시대의 흐름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요즘처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종교인으로써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면 그것처럼 성스러운 모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원했던 수도인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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