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8일 봉불식을 마친 하단성적지의 부산역사기념관과 하단교당. 1층은 역사관, 2층 유물관, 3층 하단교당이 들어섰다.
원기16년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 부산 행가를 시작으로 불법연구회 하단지부의 첫 간판을 걸게 돼 영남지역의 최초 교당이 설립된다. 영남지역의 교화발상지인 하단성적지는 영남권 교화의 효시가 된 곳이며, 초창기 소태산 대종사가 11번이상 다녀간 곳이다. 지난 6월18일 하단교당과 부산역사기념관이 신축돼 봉불식을 가지면서 원불교 영남교화의 시작이 더욱 드러났다. 지상 3층 건물로 들어서 있으며, 1층은 역사관, 2층 유물관, 3층의 하단교당으로 구성돼 있다.

원기80년(1995) 4월 당시 좌산종법사는 부산을 순시하며 "성적을 나툰 사적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키워 나가야 한다"고 유시했다. 이에 따라 부산교구는 옛 하단교당 터와 건물을 매입하고 원기85년(2000) 부산대법회를 기해 보수 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원기89년(2004) 당리교당이 옛 하단교당 사적지 옆으로 이전하며 대지 324㎡의 2층 건물을 매입해 법당과 생활관을 갖추고 당리교당의 옛 이름인 하단교당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옛 하단교당의 사적지와 교당이 함께하게 된다. 원기95년(2010) 12월 기존 건물을 완전 해체하고 복원공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원기96년(2011) 5월 '하단성적지 복원봉고식'을 거행, 이후 원불교 교보(敎寶) 11호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원기100년(2015)에는 경산종법사가 부산을 방문해 하단성적지 2차 조성사업을 유시했고, 원기102년(2017) 6월18일 연면적 796㎡의 원불교 부산역사기념관과 하단교당이 들어서게 됐다.

영남의 문을 연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을 제정한 후 삼대여걸이라 불리는 박사시화, 장적조, 최도화 선진을 지방교화로 내보내게 된다.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는 경남 통영이 고향인 영남사람이다. 처음에는 대구에 내려가 교당을 세우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원기14년 아들 이덕환이 살고 있는 부산에 내려가게 돼 이곳에서 순교활동을 펼치며 영남교화의 시조가 됐다. 장적조 대봉도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세정을 살펴보고 그에 적절한 말을 건네는 것으로 인연을 걸었다. 그러는 중에 원불교 초기교서인 〈육대요령(六大要領)〉을 내놓고 사람이 밟아야 할 떳떳한 길인 인도상(人道上)에 적절한 방법을 제시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장적조 대봉도는 훈타원 양도신 종사의 부친인 내산 양원국 정사(현 하단교당 양성원 교무의 증조부)를 만나게 되는데, 양원국 선진은 〈천수경〉을 십만 번 독송했다는 뿌리 깊은 불제자였다. 장적조 대봉도는 양원국 선진에게 열렬한 언사로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전해줬는데, 양원국 선진은 "우째, 여자 입에서 저런 좋은 법설이 나온단 말인고? 대체 저 여자선생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저런 좋은 말이 나올꼬" 하며 그 생불이라는 분을 만나보고자 했다고 한다.

원기16년 가을, 대종사와 불법연구회 회장 조송광이 부산에서 어장을 하는 박허주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가 대종사가 경상도 땅을 처음 밟은 때이다. 양원국 선진은 추석 전날 대종사를 만나 법문을 듣고 3천년 전 석가세존을 뵌 듯 기뻐했다.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로 눈물을 흘리고 제자 되기를 청하며 "지 마음에 석가세존을 모신지 43년 만에 드디어 생불님을 뵙습니더"고 말했다. 이때 대종사가 친히 원국(元局)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부산회원들의 청함을 받아 대종사를 모시고 부산에 첫발을 디딘 조송광 회장은 그의 연대기 〈조옥정백년사〉에 다음과 같이 감상을 기록하고 있다. "장하고 기쁘도다 장적조씨여, 우리 조선 유문(唯門) 같은 부산항의 온갖 물품 온갖 기술이 많건마는 하필 우리 인류상 대자연의 도만 없다. 천우신조로 우리 매(妹)씨 아니면 어찌할꼬. 지성기도(至誠祈禱)에 금석가투(金石可透)라, 어찌 대회상 아니될까. 전후좌우 종사주를 시위(侍衛)한 남녀노소 태을선관(太乙仙官) 하강한 듯 날마다 온갖 법문과 가입서 기재에 분망하다. 백여 명 입회에 관광자 불가수라, 이는 모두 적조선생의 설단(舌端)으로 생활로를 찾은 사람이다."

소태산 대종사와 조송광 선진이 10여 일간 체류하는 동안 40여 명이 입회, 회원수가 총 80여 명에 이르렀다.
▲ 장적조 대봉도와 양원국 선진이 현재 하단성적지에 마련했던 불법연구회 회관.
하단출장소와 초대교무 김기천 종사

장적조 대봉도와 양원국 선진은 회원이 가장 많은 낙동강 하구 하단에 회관을 마련해 '불법연구회' 간판을 걸게 됐다. 그때 지어진 하단성적지의 갈대지붕집은 부산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갈대집이며 당시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해오면서 복원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원기17년에 부산 하단지부가 창설되면서 삼산 김기천 종사가 하단출장소의 초대 교무로 임명받았다.

그때 나이 43세다. 김기천 종사는 부산교화 2년 만에 남부민동에도 출장소를 마련해 김영신 교무를 여자 전무출신 정녀로서 최초로 지방교무로 부임받게 했다. 또한 회원훈련과 지방발전에 노력하느라 홀망함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심오한 진리의 감각감상과 가사 등을 제작해 본관에서 발행하는 '회보'에 기고해 신성을 장려하고 공부와 사업을 하는 길을 얻게 했다.

원기19년 여름부터는 지역사회 무산(無産) 아동들의 문맹을 퇴치시키는 등 순일무사한 정성으로 본교의 교화발전에 헌신했으며, 야학생인 훈타원 양도신 종사가 이듬해 전무출신 하는 데 기여했다.

원기20년에는 김기천 종사의 교화에 힘입어 교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량 등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부산교화의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다.

부산교화에 전념하며 대성을 기약하던 김기천 종사는 그해 8월 교화가 성장해 초량 등지에도 교당을 세우고자 염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티푸스에 감염돼 부산 하단지부에서 그해 9월6일 46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김기천 종사는 열반을 앞두고 김영신에게 "내가 지방에서 수년간 지내보니 옛적 8~9인 동지와 종사부주(대종사) 슬하에 있던 때가 그립구나"하고 회상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김기천 종사가 위급하다는 병보를 듣고 금강산 일정을 취소한 뒤 총부에 돌아와 일산 이재철 종사를 문병차 부산으로 급파하는 등 대중들과 더불어 완쾌를 기원했다. 9월6일 새벽3시경 '하단 삼산교무 열반'이란 전보가 배달됐다. 대종사 대중을 이끌고 대각전에 나가 좌정한 뒤, 한참 동안 심고를 올리고 "김기천은 나를 만난 지 18년이라, 일호의 사심도 내지 않은 정진불퇴의 전무출신이요, 오직 희유의 공로자라, 가는 기천이도 섭섭하거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다"하고 통곡했다.

삼산 김기천 종사는 원기13년에 새 회상이 생긴 이래 소태산 대종사에게 처음 견성인가를 받은 제자였고, 대종사에게 견성인가를 받을 당시 우레 같은 박수와 아울러 이청춘 등 몇몇 여인들은 "우리 회상에 견성도인이 나셨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한다. 김기천 종사의 열반 후 그의 뒤를 이어 양원국 정사가 3년간 재가의 신분으로 교역자 활동을 하게 된다.
▲ 부산역사기념관의 내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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