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종로교당 이광정 교감님의 격려 속에 1985년 5월 청년회 내 에스페란토 소모임 '일원회' 정기총회에서 홍성조, 육철 중심으로 〈정전〉 번역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나는 8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치룬 후 사요부터 번역함으로써 참여했다.

"우리말로 편찬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고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전망품 3장을 실현시키는 일꾼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번역에 몰입했다. 이는 정말 아쉬운 시험 결과가 방황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86년 2월 법위등급까지 번역을 마쳤다. 그해 8월 에스페란토 원불교 안내서가 발간돼 제5차 한·일 청년세미나 참가자와 본회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원불교를 알리는 데에 기여했다. 이때 '일원회'가 '원불교에스페란토회'로 단체명이 변경됐다.

종로교당 청년회 회장을 맡은 1987년부터 1990년 6월 헝가리 에스페란토 유학을 떠날 때까지 교당에서 살면서 교당 일과 청년 활동을 함께 했고 이광정 교감님의 교리 지도를 받으면서 〈정전〉 에스페란토 번역을 윤문했다. 4년에 걸쳐 총 2천 시간 11차례 윤문 과정을 거쳐 1988년 3월 에스페란토 〈정전〉 교서감수회의가 총부에서 두 차례 열렸다. 이때 회의에서 고산, 숭산, 구타원 종사님들을 목전에서 뵙게 되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어서 종이에 손글씨로 번역해 한 단어 한 단어를 타자기로 옮겨 쳐야 했다. 그해 9월 11일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에스페란토 〈정전〉발행 봉고법회가 열렸다.

에스페란토 〈정전〉은 한국 종교 경전 중 최초의 에스페란토 번역서이다. 에스페란토 언어 능력, 교리 이해 능력 그리고 번역상의 표현 능력이 두루 필요하다. 이광정 교감님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하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큰 일을 끝냈으니 다시 고시 준비에 몰입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여전히 원불교 활동과 에스페란토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한국에스페란토 청년회장까지 맡아 8월 일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한 달간 에스페란토로 일본 곳곳을 둘러보았다. 에스페란토가 살아있는 언어임을 실감한 이 여행이 내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박사 과정 진학, 고시 재도전, 취업, 출가 등 장래에 대한 고민 속에 늘 교서 번역에 대한 애착이 자리 잡았다.

〈대종경〉 번역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에스페란토 어학 실력을 높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에스페란토 운동이 활발하고 일정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3년간 에스페란토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수위단회 중앙으로 계시던 좌산 상사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에스페란토 학과를 둔 엘테대학교 교수를 만났다. 그가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자 여행으로써 얻는 언어 능력보다는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얻는 언어 능력이 훨씬 더 가치 있을 것이라 믿고 입학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대종경〉 번역 작업을 이어가서 1887년 에스페란토가 공표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992년 10월 〈대종경〉 번역을 완성했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사무국장과 대회조직위원으로서 1994년 서울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다시 유럽으로 가서 학위논문을 마치는 한편 〈대종경〉 번역을 윤문했다. 1997년 6월부터 1년간 좌산 종법사님의 배려로 총부 성불당에 살면서 〈정전〉과 〈대종경〉 전체 윤문 작업을 했다.

이때 총부 교무님들과 수많은 문답과 의견교환을 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법실에 찾아가 의문사항을 하나하나 지도를 받았다. 수위단회 교서 감수위원회의를 거쳐 1998년 6월28일 에스페란토 원불교 교전 출판 봉고식이 열렸다. 이렇게 나온 에스페란토 교전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었다.

/에스페란토 정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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