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정례법회의 순서 중에 제일 기분 좋은 순서는 '산회가'를 부를 때이다. "거룩한 회상에 참예한 행복/ 저마다 나홀로 차지를 한 듯/ … 이날에 얻은 법 정신의 양식/ 실제의 생활에 광채를 내고/ 반가운 얼굴로 돌아오는 횟날 …" 산회가를 부르면서 교전을 챙겨 가방에 넣는다. 괜히 기분이 좋다. 기분이 왜 좋을까? 숙제처럼 정례법회에 참석했고, 모든 순서를 원만하게 마무리해서 좋은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다.

법회의 순서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의식이 없다. 독경이나 심고에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참여한다. 그 순간 간절하지 않으면, 독경이나 심고가 법신불 사은에 가닿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독경이나 심고를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 간절함은 흉내 낼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말로 심고를 하고 기도를 한들 간절하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이 모두 무효다.

교무님이 설교를 시작한다. 단상에 오른 교무님의 얼굴을 보며 귀를 쫑긋 연다. 한 말씀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교무님의 입에 집중한다. 시간이 흐르고 말씀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귀는 열어두었으나 눈이 감기면서 고개가 조금 숙여진다. 많은 교도님들이 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원로님들이 조금은 '짠하다' 라고 생각한다. 앞자리에 앉아 자울자울 졸고 있으면 얼마나 민망할 것인가.

교무님의 설교는 한 쪽 귀로 흘러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간다. 마치 콩나물에 부은 물이 시루 아래로 주루룩 내려가듯이 말이다.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대다수의 물은 그렇게 흘러내린다. 백 바가지의 물을 부으면 그 중에 한 바가지 정도만 콩나물 뿌리에 닿을 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 바가지의 물이 새나간다 해도 콩나물은 자란다. 심지어 무럭무럭 자란다.

졸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볼을 살짝 꼬집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무님의 질문에 거의 대답이 없다. "하하, 알겠습니다. 우리는 부처가 아니란 뜻이네요. 부처가 뭐 별 거 아닙니다.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면 그게 바로 부처지요." 마지막 말씀에 눈이 번쩍 뜨인다. 졸음이 싹 달아나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스스로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했었다. 다른 사람을 낮추고 나를 높이기 위해 말을 만들어내고, 말을 전달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부처가 아니라 야차였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려고 했던 노력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솔직히 '지난 법회에 얻은 법 정신의 양식으로 생활의 광채를 내'지 못하였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나의 오류들, 경계에 무너지던 순간들, 울울창창한 욕망의 풍경들이 떠올랐다. 설교를 듣고 좋은 가르침을 받고 성찰하고 깨우친다고 해도 다시 사바세계로 나가면 나는 부처가 아니라 야차가 될 것만 같았다.

오! 사은이시여, 이 미련한 중생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러는 사이에 설교는 끝났다. 나는 날마다 이렇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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