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태 교도/연희단거리패 연출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부산 대신교당과 인연이 돼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교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을 떠돌다보니 교당생활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있게 한 곳이 원불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당시 배고픈 시절에 교당에서 내어준 따뜻한 밥을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는 밥을 평생동안 잊을 수 없었다. 밥이라는 것은 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이경민 정토(박대성 교무)가 내 연극을 보며 "소태산 일대기를 다룬 서사극을 다루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내가 원불교 교도임을 몰랐는데 "저도 법명을 받은 원불교 교도입니다"하고 인사드리니 매우 반가워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을 하고 서사극을 위해 글을 쓰고 준비를 해나가는 중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면서도 서사극을 맡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먼저 대한민국에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성자에 대한 인물을 다룬 연극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종교 이야기다보니 일반 관객들은 관심이 없고, 또 실제 교단측에서 마음에 안들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할 정도로 이 작업을 하지 않았는지 걱정도 들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내가 반드시 해내야 할 필생의 작업이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나를 던져서 넘겨야 할 고비가 아닌가 생각했다.

다음으로 나는 태생이 불교다. 어머니께서 통도사의 사천왕 가운데 하나가 걸어나온 태몽을 꾸셨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절에 가면 불상을 보는 게 싫었다. 실제 금도 아니면서 금칠한 불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강한 회의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릴 때 만난 원불교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 표어를 접하고 굉장한 의미를 발견했다. 자세히는 알지 못했어도 그 화두를 가지고 살아왔다.

올해로 나이가 만65세가 된다. 교수라면 학교에서 퇴직해야 하는 시기다. 여러 가지로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7월9일)이다. 이번 기회에 소태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내 가치관에 대해 정리해봐야겠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특히 '모든 경전을 가져와 보라'는 부분에서 나는 환희에 찬 탄성을 질렀다. 이는 훑어내리면서 당신의 공부와 비교한다는 의미다. 이 부분은 나와도 통했다. 혼자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에는 독학하며 서점에 들려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었다. 나 역시 책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소태산도 이렇게 사셨구나를 직감했다.

세 번째는 원불교가 증산교나 천도교 등과 다르게 아주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노동이다. 대부분 종교단체들이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아니면 사회운동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 소태산은 노동을 했다.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 노동은 곧 밥이었다. 그러면서 외람되지만 소태산은 위대한 연출가이자 배우였다. 노동과 문화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서사극을 준비하면서 오로지 소태산에 집중했다. 신비주의나 상대주의 부분은 모두 뺐다. 오로지 인간 소태산에 대해서만 파고들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열반할 때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막을 올려야 하는데 나의 마지막 화두였다. 어느 자료를 뒤져도 안 나온다. 레퀴엄 음악을 넣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소태산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가 말했다. '울지마라 울지마라 통곡을 그칩시다'라는 말이 소태산 열반식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말을 <소태산평전>에는 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내게 크게 다가왔다. 대중이 혼돈스러운 와중에 그 외침은 원불교가 다시 출발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울거나 통곡할 문제가 아니라 이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제시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서사극에 이 말을 넣음으로써 이 작품은 완성됐다.

내 인생에 있어서 소태산의 삶을 희곡으로 쓰고 연출하게 된 것은 최고의 영광이고 명예로 받아들인다.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등 내 자신에 대한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게 됐다.
나를 교단에서 불러주고 나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은혜에 감사를 전한다.

※ 본고는 9일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진행된 일요예회 때 발표한 감상을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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