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구수미장날, 장꾼들의 〈동경대전〉 〈주역〉 일구 듣고 오도 확인
대각당년 경축가에 사은사상, 최초법어에 삼학 기본이념 나와
제 혼자 올연한 준봉이 아니라 다함께 만학천봉 대해로 합쳐


내일이 처사 양반 생일이었다. 바랭이네는 구수미 장에 가는 장꾼에게 미역과 홍합을 사오도록 부탁할 참이었다. 이른 아침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기겁하고 놀랐다. 봉두난발 처사 양반이 세수를 마치고 상투머리도 단정히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가세 좀 주게나."
전에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째서 가세(가위)를 찾나.
"손톱이 너무 길어."
처사 양반이 이른 아침 세수하고 머리를 다듬고 손톱을 깎다니!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처화도 신새벽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십년 묵은 체증 걸린 듯 답답했던 가슴이 상쾌했고 무겁던 몸이 날아갈 듯이 경쾌했다.

병진년 삼월도 스무엿새 날이라 유별나게 화창한 봄 날씨였다. 안개가 걷히면서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였고 팽나무 작은 물방울을 단 연록 빛 잎사귀들의 신록이 더욱 짙어졌다. 농사철을 앞두고 노루목에도 장꾼들의 내왕이 적지 않을 법 했다.

이날 첫 손님은 무내미에 사는 얼굴이 오종종하게 생긴 김씨였다.
"아짐, 여그 평지리 사는 김거복이 안 왔소라?"
김씨가 숨을 헐떡거리며 부엌 안에 얼굴을 내밀고 아침부터 다 죽어가는 상을 하고 물었다.

"아녀라우. 장에 나간 사람이 몇 안 되여라."
"아짐, 목이 탄게 어여 탁배기나 한 사발 주시요이."
바랭이네 말에 김씨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평상에 앉아 곰방대를 꺼냈다.

"왜 그라랴? 집안에 우환이 있어라?"
"아그들 엄니가 고랑고랑해 다 죽게 생겼당게요."
김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랭이네가 술국과 산나물 두어 가지와 막걸리 방구리가 올려진 소반을 들고 평상으로 내왔다.

"그려라. 참말로 걱정이것네요. 어쩐다요? 거복씨는 왜 기다려라?"
"그 사람들이 비방이 있다고 장담을 하기에 만나기로 혔구먼요."
"그 사람들 동학하는 사람들이지라?"
"맞아유. 마침 저기 오네유."

술사발을 들이키다 말고 김씨가 반가운 내색을 했다. 김거복이 갓을 쓴 식자께나 듬직한 위인과 동행했다. 인사들을 나누고 세 사람은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아그들 에미가 오랜 속병으로 백약이 무효라, 대체 어떤 비방이기에 저 사람이 큰소리를 치는지 궁금혀서 만나자고 혔구먼유."
"자네 내자 이야기는 거복씨한테 들었네."

갓 쓴 선비가 헛기침을 하며 보자기를 풀었다.
"이건 하눌이 내신 신령한 비방이여. 여그 짬 보게."
▲ 노루목 실경 1943년 촬영한 사진.
갓 쓴 선비가 〈동경대전〉을 내놓고 말하였다.
"이게 우리 동학도를 창시하신 수운 대신사께서 도통을 하실 때 한울님께 받은 말씀이여. 오유영부 기명선약이라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이라. 에,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내게 신령한 부적이 있는디 이게 선약이라는 기고 태극 모양인디, 워쩌코롬 생겼는고 하면 궁궁(弓弓)이라"

"궁궁이라?"
문자 속을 알 턱이 없는 김씨는 궁궁이란 말에 비방이 있는 줄 알고 궁금해 했다.

"궁궁이면…… 에, 활 두 개를 합쳐놓은 모양이 아잉개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궁궁이라는 신령한 부적을 받아 복용혀야 헌다는 거여."

갓쓴 동학도도 활 두 개 합쳐놓은 궁궁의 형상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였다.

마침 뒷간에 앉아있던 처화가 아득한 예전부터 귀에 익은 이야기인 듯, 전에 동학을 하는 외삼촌과 이모부가 걸핏하면 주고받던, 수운 대신사께서 도통을 했네 어쨌네 하며 신령한 부적이니 활 두 개를 붙인 궁궁이니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떠올라, 그 순간 심 봉사 개안하듯 두 눈을 번쩍 뜨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옳거니, 일원대원(一圓大圓)이라! 그는 진리의 실상을 한 눈에 본 듯이 확연히 파악하게 되었다. 일원대원 대원도(大圓圖)라, 이로부터 이 말이 병진년 이후로 툭하면 곧잘 읊조리던 신이한 말이 되었다.

"이 사람아 어여 가세. 오늘 늦겠네. 구수미 회소에 접주님이 오시니 거기 가면 더 좋은 말씀을 들을 걸세."
남은 잔을 마시고 선비가 먼저 일어서며 콧수염에 묻은 허연 막걸리를 손으로 훔쳤다.

"금메, 시방 궁궁이 궁금한디……"
"이 사람아, 참말이랑께. 우리 신령한 부적보다 용한 선약이 없다네. 어여 가세나."

장꾼들이 가고 텅 빈 노루목 마당에는 처화 혼자 남았다.

"대원도…… 하! 일원대원이라……"
처화는 양 팔을 한껏 벌려 한 바퀴 휘두르며 미친 사람 모양 중얼중얼댔다.
▲ 노루목 실경 1943년 촬영한 사진.


자력으로 구하는중 사은의 도움이라

스승 없이 도를 깨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스스로 도업을 성취한 처화는 한없는 만족감과 요행감을 느꼈다. 그 과정을 생각하여 보면 순서를 알지 못하겠으나 '강연히 말을 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四恩)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원력과 그를 도와주는 은혜, 처화는 이 은혜를 네 가지 중한 은덕이라 하였다. 천지신명의 은덕,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여 생장시켜 준 부모님 은덕, 형제와 이웃 등 세계 동포은덕, 사회 질서 법률 은덕을 일컬어 사중 은덕(四重恩德)이라 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고 하였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일관된 원력과 사중 은덕의 도움으로 도업을 성취한 처화는 자신의 법열을 자축하는 <보은경축가>에서 '천지은덕·부모은덕·세계은덕·법률은덕'을 노래하고 사회를 본 첫 감상 <수신의 요법>에서 3학을 이야기했다. 사은사상과 삼학은 오도 당년에 나온 것이다.

소태산은 봄의 절정(絶頂)에서 오도하였다. 기나긴 겨울의 터널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봄, 어느 사이 이른 새벽에 문득 온 봄, 푸른 산이 있고 물결이 반짝이며 흐르고, 보리가 부쩍 자라고, 만물이 봄빛에 취해 온 누리에 새소리 가득한 때 사람의 마음엔들 어찌 물이 오르지 않으며 싹이 트지 않으며 꽃이 피지 아니하며 시가 뛰놀지 않겠는가.

산이로구나 산이로구나

천봉만학(千峰萬壑) 좌우 산천 우뚝 솟아 높아 있고 물은 흘러 대해(大海)로다.
1년 360일에 4시절이 돌아와서
산은 또한 산이 되고 물은 또한 물이 되어 천지 만물 되었도다

처화의 크나 큰 사자후, 오도의 기쁨이 극하여 처화는 <탄식가>라 하였다.

열렸구나 열렸구나 밝은 문이 열렸구나
밝은 문 열어 노니 명도(冥途)판결 우리 학도 전정(前程)이 만리로다

박처화는 자신이 다시 새롭게 났다는 의미에서 '중빈(重彬)'이라 새 이름을 지었다. 다시 중 빛날 빈, 다시 새롭게 빛나다, 그는 빛의 존재였다.

제 혼자 올연히 높은 산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하는 모두가 천봉만학 좌우 산천 우뚝 솟아 높아있고 물은 흘러 대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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