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에는 큰 주인돼서 다시 오리라"

아버지 반대한 출가, 사고 많았던 부교무 시절…시련과 역경 딛고 교화 사업 매진해
한시도 잊지 못하는 대산종사…법문 사경과 좌선 적공으로 내생 서원 다져가고 있어



"누가 알아주면 뭣하냐. 내 실력이 최고지. 자력이잖아. 우리는."
위풍당당함이 풍기는 최인춘 원로교무(伯陀圓 崔仁春·72)의 첫 마디는 그가 그동안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짐작케 했다.

전무출신 하나는 나와야

"딸이 넷이나 되니까 전무출신 하나는 내놓아야 한다고 고모가 그랬지."
하나뿐인 고모는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마령교당 주무로 30여 년 봉직한 최근숙 교도였다. 아버지는 큰딸이었던 그를 시집보낸다고 했지만, 그는 시집와서 평생 한 가정의 식모처럼 살고 있는 어머니와 같은 인생을 살기 싫었다.

"그때 난 '아들은 책임져도 딸은 시집보내면 끝나버리구나' 생각했지. 나는 절대 어머니처럼 안 산다 그랬어."

마령교당에 다니면서는 집안에 전무출신 하나는 나와야 한다는 고모의 바람으로 그는 출가 결심을 굳혀나갔다.

김제는 절대로 안돼요

출가하려면 간사근무를 해야 한다는데 다급했다. 아버지 몰래 총부에 와서 용타원 서대인 선진께 인사드렸다. 그런데 김제교당으로 가라는 말씀에 그는 망연자실했다.

'용타원님, 김제로 가라니요. 안돼요. 김제로 가면 우리 아버지가 금방 붙잡으러 와요'하며 싹싹 빌 지경이었다.
그래서 갔던 곳이 강원도 화천으로 간사근무를 떠나게 된다.

"송타원 백수정 교무를 모시고 살았지. 백지명 교무의 고모되는 분이여. 우리 고모와 닮은 점도 많으셨어."

당시 어려운 교당 살림인지라 주임교무는 한 공기 밥으로 세 끼를 나눠 먹었다. 어느 날 주임교무가 먹고 남은 밥을 찾으니, 본인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찬밥을 찾으시길래 내 마음에 찬밥을 드린다는 게 죄송해서 '없다'고 그랬어. 어떻게 아셨는지 찬장에 숨겨놓은 찬밥을 찾으신 거여. 그러면서 이제까지 키워났더니 거짓말만 한다고 그날 어떻게 혼을 내던지. 내가 그때 얼마나 무섭게 컸던지 지금도 거짓말을 못혀."

당시 자신을 엄하고 무섭게 키우셨지만 그것이 다 자산이 되어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고마워서 지금도 부모님과 고모, 송타원님을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고 있다.

시련의 첫 발령지

간사를 마치고 학교에 입학하니 얼마나 즐거웠던지 학창시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원기60년 영광교당이 첫 발령지였다. 당차게 살았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같은 고향 출신이었던 오종태 영산선원장에게 부임인사를 드리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중 저수지 부근에서 사고가 났다. 택시가 저수지 반대편 언덕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다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자칫 큰일날 뻔 했다.

또 연탄불로 난방하던 시절이라 어느 날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영광교당에서 운영하던 부화장에서 새벽에 불이나 부화장에 있던 병아리 몇 천 마리가 죽기도 했다.

"지금 영광교당 자리가 당시에 부화장이었어. 겨울이라 병아리들 춥다고 연탄난로를 켜놨는데 그게 불이 난 거여. 지금 생각하면 천도재라도 지내줘야 했는데, 죽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아. 일주일 동안 거기를 못 들어가겠더라고."

당시 어렸던 그에게 이러한 사건사고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화천에서 모시고 살았던 백수정 교무가 있는 홍천교당에 찾아가 다시 1년을 살다가 대산종사를 모시고 법무실에서도 1년을 살았다.

사업적 기지 발휘의 순간

힘들었던 시절에서 본격적인 교화 사업의 주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원기63년 양산교당 부교무로 부임하면서였다. 당시 청년이었던 박은성 교도를 만나 40여 명이나 되는 청소년 교화를 일궜고, 박은성 교도도 출가시키게 된다.

또 물금면에서 양산교당으로 법회를 보러오던 최덕진 덕무(김정륜 교무 모친)가 물금에 교당 설립 원력을 세우고 대지 200여 평을 희사해 원기65년 물금교당 초대 교무로 부임하면서 교화의 터전을 닦았다.

그가 사업역량을 얻게 된 곳은 강원도 속초교당에 발령 받으면서 부터다. 은타원 조일관 선생이 갖은 고생으로 속초교당을 쌓아올리다 열반한 이후 방치된 채 3년이 지나자 관에서 총부로 전화 한통이 왔다.

"여기는 관광지인데 건축물을 부수려면 부수고, 마무리할라면 하라고 전화가 와. 지은 것도 아니고 부순 것도 아닌 건물이 흉물이라 문제가 된다는 거야. 그래서 당시 서울에 사업을 진행하려고 서울지원금이라고 있었는데, 대산종사님이 그거 가지고 속초에 가라는 거야. 재무부에서 일하는 직원하나 데리고 같이 갔지."

산 넘어 산이었다. 외롭고 어렵게 교당을 짓고나니 옆 건물에 교회가 생겨 교화가 어렵게 됐다. 그러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을 허가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 교육청에 가서 직원에게 '원불교를 아십니까'하니까 모른대. 그래서 '원광대학교는 아십니까'하니까 잘 안대. '원불교는 원광대학교에서 낸 겁니다'하면서 '원광대학교에서 유치원 개설해 준다고 하는데 허가 내주십시오'라고 했지."

그의 기지 발휘는 빛났다. 원기70년 속초교당 부설 원광유치원이 개원되면서 40명 신입생으로 지역교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교화력을 바탕으로 강릉지역 출장법회를 이끈 정성으로 교당 봉불식까지 이끌어냈다.
▲ 대산종사 법문을 사경한 세월 만큼 노트도 쌓여갔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

그는 어디를 가든지 불사를 이뤄냈다. 원기71년 면목교당에 발령받아 일반주택을 매입개조해 이안 봉불식을 했고, 원기76년 에 근무했던 창원교당에 원기96년 재차 부임해 4차선 대로변에 지하1층, 지상4층 건물을 매입해 교화터전을 세웠다. 원기83년 인후교당에 발령받고서는 대지 405평, 연면적 282평의 3층 건물의 신축교당을 지었고, 원기94년 둔산교당에 부임해서는 대전시 탄방동 4층 건물을 매입해 교화의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했다.

"내가 동짓달에 났는데 우리 아버지가 방에 불을 안 넣었다 그러더라. 집안에 아들 하나인데 징병 가기 전에 아들을 봐야 하는데 딸이 나오니까 속이 그렇게 타서 그랬대. 근디 점쟁이가 아버지 보고 쟤를 무시하지 말라고 했디야. 절대로 무시하면 안된다고."

우체국과 농협에 근무하며 성실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봉산 최상공 대호법이었다. 맨 주먹으로 자수성가를 해서 전주 화산동 대지를 희사해 화산교당과 청소년수련실 건축, 영산선학대학교의 경제적 토대를 세울 정도로 경제감각이 뛰어났다. 이러한 아버지의 능력을 물려받아 어디를 가나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예견한 점쟁이가 '무시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주인이 돼야지, 객은 안돼

"나는 한순간도 대산종사님을 잊은적 없어. 철없을 때 잠깐 모시고 살았지만, 학창시절에는 대산종사님 뵈러 그렇게 많이 쫓아다녔지. 나중에 수필법문이 나왔을 때는 틈나는대로 읽으면서 와닿는 법문이 있으면 사경하는 재미로 지금까지 살고 있어."

퇴임 후까지 이어져오는 사경노트는 수십 권에 이른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절절한지 몰라. 어떻게 이 정법을 만났을까. 내생은 내가 큰 주인돼서 오리라 마음먹고 있어. 객이 되면 못써."

한번 앉았다하면 3시간은 거뜬히 정진해야 하는데, 아직 3시간이 조금 부족하다는 그. 수줍으면서도 호탕한 웃음에 여장부의 당당함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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