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동부교구 뉴저지교당
대가를 치루지 않고 이뤄지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는 말이 진리다. 처음 뉴저지교당을 설립할 때에 뉴욕교당의 입장에서 고민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도들이 뉴욕과 뉴저지를 넘나들며 꼭 거쳐야 하는 두 개의 다리와 지불해야 하는 통과비용, 거기에 대도시 교통체증까지 합하면 그 고충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뉴저지의 새 인연을 뉴욕교당까지 안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뉴저지교당 설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원기96년 2월28일 클로징을 마치고 교도 집에서 교당 건물까지 오가며 수리를 시작했다. 뉴욕의 김해심 교도 덕으로 깔끔한 실내공사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입주허가를 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1층은 종교활동 공간으로 2층은 생활공간으로 용도를 변경해야 했다. 영어실력이 부족한 나는 두 개 언어가 가능한 한인 변호사와 설계사를 선임해 마을 공청회를 두 차례 열었다. 그런데 잘못된 변호사 선임으로 우리는 꼬일 대로 꼬이고 말았다.

결국 교도의 도움으로 마을 토박이 현지인 변호사와 설계사를 선임하고 다시 절차를 밟았다. 지하에 비상문을 하나 더 내는 조건으로 종교활동이 가능한 시설로 용도변경이 가능하다는 지역공청회의 결의서를 받아들이게 됐다. 건물 구입 후 3년만의 쾌거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빌딩국과 소방국이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설치돼야 건물 허가를 해준다는 답이 왔다. 간판도 걸고 교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들떠있던 마음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또다시 3년을 보내야 했다.

원기101년 12월 말에 우리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뉴저지 스테이트에 낸 청원서에 대한 답으로 우리 건물에는 스프링쿨러 시설이 법적으로 요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1층에 대한 종교활동 허가서 한 장을 받는 일이었다. 올해 6월14일 소방국의 최종 점검 통과서를 받고 드디어 7월17일에 허가서를 손에 쥐게 됐다.

▲ 뉴욕교당의 연원으로 개척의 역사를 이룬 뉴저지교당 교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 우리의 교화활동이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교당에서 법회보기도 어려워 교도들 가정을 돌아가며 법회를 보고, 교당의 지하에서 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창문 커텐과 박스 등으로 막았다. 그래도 법회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했다. 1층 법당에 법신불을 봉안했을 때는 무척 감격스러웠다.

나는 교도들에게 사람이 많아지고 활동이 넓어지면 오히려 오롯하게 교리공부 할 시간이 적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열심히 정진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1년에 두 차례 교도정기훈련을 꾸준히 하고 있고, 교구 교리퀴즈법회에 나가 1등도 했다. 원기100년에는 교도님들과 성지순례도 다녀왔고, 매년 가을에는 뉴저지 한인회에서 주최하는 추석잔치에 민속놀이마당을 4년째 진행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활동에도 발걸음을 내디뎠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미주동부교구 소속 심원훈련원의 운영관리를 맡아 대대적인 건물수리를 마쳤다.

현재 교화하는 중 가장 아쉬운 점은 영어권 교화에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허가의 제한점도 있지만 영어권 교화자가 없음이 큰 한계였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내년에는 내게도 인연이 오겠지 하고, 교화개척의 6년 역사에 인물가난, 실력가난, 물질가난 등으로 말 못할 고민도 많았지만, 크게 병나지 않고 이겨온 것은 법신불 사은과 선후진 동지 교무들의 합력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교무를 아껴주는 교도들에게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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