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은 이미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와 원불교의 사은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이미 석존의 시대에도 강조되었다. 〈육방예경〉에서는 자산가의 아들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아침 일찍 왕사성 밖에서 목욕재계하고 동서남북상하의 6방을 향해 예배를 하는데 그 의미를 몰랐다. 석존은 그에게 그 이유를 자상하게 설명했다. 즉 동방은 부모를, 남방은 스승을, 서방은 처자를, 북방은 친구를, 하방은 노비나 고용인을, 상방은 수행자와 바라문이라고 하셨다. 이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후에 대승경전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사은도 등장하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국왕·부모·스승·시주(施主), 어머니·아버지·여래·설법법사, 부모·왕·삼보·중생 등의 사은을 여러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 사은은 〈심지관경〉에서 설하는 것으로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 한다. 물론 보은이다. 대승의 가르침은 지은보은이야말로 성스러운 도라 한다. 세상에서 진정 지은보은을 행한 분은 부처라고 한다. 〈대보적경〉에서 지은보은은 보살행이며, 그 이유로는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불보살의 윤리이기도 하다. 모든 중생은 공성에 바탕한 무아이자 무자성의 존재인 동시에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연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한 가족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정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중국에서는 사은 가운데 효를 문제 삼았다. 출가자는 대를 이을 자손을 생산하지 않으므로 불효라고 비판받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는 오히려 대효를 통해 이 은혜의 윤리를 더욱 확장시킨다. 유교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 반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예기〉에서 작은 효는 힘을 쓰고, 중간 효는 수고로움을 쓰고, 큰 효는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설을 기반으로, 출가자는 위로는 일체 부처에게 순응하고, 중간은 사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일체 생령을 구제함으로써 이 셋이 부족하지 않게 함을 대효 가운데 하나라고 설파했다.

대승경전에서 지은보은은 공덕 중에 가장 크며, 가장 훌륭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지은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보은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가르친다. 즉 최상의 은혜는 중생이 번뇌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성불하여 극락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석존의 전 생애가 진리에 대한 지은보은의 삶이며, 불제자 또한 그의 모범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원불교 또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사은은 진리의 근원인 법신불의 무량한 생명, 무량한 은혜, 무량한 자비, 무량한 평등의 덕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은은 네 가지 은혜를 말하지만, 법신불의 이 덕성을 우리 인간에게 보다 이해하기 쉽게 드러낸 것이다. 무한히 샘솟는 생성조화, 따뜻한 대자비의 생육, 모두를 조화롭게 살리는 상생 상화, 일체가 진리 앞에서는 공정하고 공평한 은혜의 덕상이야말로 법신불 진리의 근원이자 우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령을 완전하게 살리고, 끝까지 보호하며, 지선과 지복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사은은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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