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인 교도/남서울교당, 원불교미술협회
일반 미술제와 달리 종교단체가 주최하는 미술제는 다음의 두 가지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첫 번째는 '예술성보단 종교색채가 강하겠구나.' 두 번째는 '연례행사로 진행되는 본인들 축제이겠구나.'
성격상 이 상황이 자연스럽긴 할 것이나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뻔한 미술제라는 식상함이 먼저 연상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주최 측과 관람객은 어떤 식의 입장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시자 입장에선 종교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봐줬으면 할 것이고 보는 사람 입장에선 종교적 행사로 치러지는 전시를 굳이 볼 필요 있을까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간극은 어떠한 식으로든 좁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는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전시는 그런 부담 없이 좋은 작품을 대할 때이다. 비록 종교적 주제더라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본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예술은 어떤 식의 표현이든 물질을 이용하여 어떤 느낌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예술적 가치로서의 환영일 것이다. 이 느낌이 예술성보다 종교적 교리를 강요하거나 윽박지르고 있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고 불편하겠는가? 따라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비록 종교적 주제라도 어떻게 감추고 드러내고 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들의 사유와 표현력이 특히 더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크게는 종교적 행사이나 예술행위를 통한 미술제의 형식은 드러냄과 감춤의 변주를 통한 은유와 상징을 내포할 수 있어야 자연스럽다.

잔잔한 호수는 고요함으로 하늘을 품는다. 깊이가 얕거나 물결이 일면 품어 낼 수 없다. 스스로를 고요함으로 감추어 제 깊이를 드러내고 하늘의 어떤 변화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내세움이 아닌 감추어 포용하는 드러냄이다.

두 번째는 본인들만의 종교행사라는 인식의 개선이다.

이를 위해 먼저 미술제 제목을 재고 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면 직설적 표현인 '원불교미술제', '일원미술제'보단 '사은사요', '은현자재', '무시광겁' '무위이화' 등 원불교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이념으로 타이틀을 대체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색채는 감추어지지만 내용으로는 원불교의 깊이와 내면이 더 드러난다.
▲ 제1회 원불교 문화예술축제 '일원화 100년의 향기' 개막식에서 커팅식을 하는 모습이다.
이상이 인상에 대한 우려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이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작품의 내용일 것이다. 좋은 작품으로 전시되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차치 하더라도 가장 우선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미술제의 목적에 부합되면서도 예술성 있는 작품일 것인데 이 부분의 해결은 작가 자신들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생각된다지만 여기서도 전시기획의 묘미가 필요할듯하다. 작품의 주제와 크기에 대한 일관성은 미술제의 격을 좌우한다. 전시목적과 동떨어진 작품은 전체 분위기에 맥락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주제의 명료함은 작품의 일관성에 기여한다. 따라서 해마다 작품의 주제가 달라진다 해도 주제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

또한 작품이 너무 작으면 작가들의 수준 또한 작아 보인다. 참여 인원에 비례하여 작품 크기를 가늠하고 전시장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