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왜 이 세계는 은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 또는 우주 안에서 함께 사는 한 서로를 인정하고 도우며 살 수밖에 없다. 사막의 베두인족은 환대의 논리가 있다. 어떤 낯선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도 따뜻하게 맞이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해매는 것은 죽음에 다름이 아니다. 그들이 타인을 한없이 배려하는 것은 언제가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곧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은 이처럼 함께 사는 인류의 삶의 방식이다. 이를 깊이 생각해보면, 베두인족의 그 환대 행위야말로 법신불의 무한한 은혜의 활동이다. 같은 시공 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나아가 은(恩)은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생성의 모습이다. 따라서 사은은 세계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통한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연기론적 세계관이다. 불타는 연기론를 깨닫게 되면 곧 자신과 진리를 이해하는 자라고 했다. 연기의 세계는 정각의 핵심요소이다. 연기는 조물주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생명체는 공생과 상생의 관계로써 전쟁도 평화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한 마음이 다른 모든 존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인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하는 동안 독립될 수 없는 관계다. 무인도에 표류해서 극복해 가는 이야기인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오히려 대자연이 있었기에 살아난 것이다. 식인종의 출현마저도 그가 교화하면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는 생철학적 세계관이다. 이성 중심과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생생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상이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의 사상도 여기에 기반한다. 다윈의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의 경우,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며, 생생약동하는 삶은 이성적인 논리보다 직관이나 심정적 체험에 의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생철학은 과학과 자본주의에 의해 뒷받침된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한 사르트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을 낳았다. 동양에서는 〈도덕경〉에서 '함이 없음에도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철학에 이미 역동적인 삶 그 자체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다.

셋째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이다. 지구환경문제로 인해 잘 알려진 제임스 러부룩이 주장한 가이아 이론은 가장 대표적이다. 이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작용하며 진화해가는 생명체라고 한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만물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사실 지구 어머니 품안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지구탄생 이래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어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소태산이 생멸성쇠의 권능을 가진 땅이 하늘과 둘이 아니며, 일월성신과 풍운우로상설이 모두 한 기운 한 이치로써 영험하지 않은 바가 없다며 설한 천지의 식이 바로 이 가이아와 다름이 없다.

〈주역〉에서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고 하는 것, 소태산이 천지인의 도의 은혜가 곧 덕이라고 한 것, 정산종사가 하늘에는 호생의 도·호생의 덕·호생의 기운이 있다고 한 것은 앞의 세계관을 포용하는 법신불의 무한대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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