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들의 온갖 세정 보살핀 대자모


초창기 어려운 교단을 돕기 위해 평생을 흔적없이 도왔던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 "나는 종사님 심부름이나 잘 할라네"라며 일은 앞에 서서 하나 공은 뒤로 물리는 공성신퇴(功城身退)의 일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성과 생애를 나주교당 방길튼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를 통해 밝혔다.

방 교무는 "그가 소태산에게 귀의하기 전 삶은 왕궁가의 첩이었다"며 "일찍 양친을 여의고 어린시절부터 형제 친척에 의탁해 살다가 18세시 소실로 들어가게 됐다"고 밝혔다. 이동진화 선진은 가난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보이며, 당시 몰락양반 집안에서 양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당시의 삶을 언젠가는 시들어버릴 '꽃병에 든 꽃'과 같은 신세라고 한탄했었다고 한다. 방 교무는 "그의 일대 전환기는 박사시화를 통한 소태산과의 만남이었다"며 "소태산의 비범함을 본 후 한평생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각성이 들자 소태산 문하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원기9년(1924) 소태산은 최도화를 길잡이 삼아 남대문정거장(現 염천교 아래)에서 내려 숭례문 근처의 태평여관에서 일숙했다. 또 성성원의 집에서 2~3일 유숙하면서 일행인 서중안의 주선에 의해 당주동에 경성임시출장소를 마련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사시화에 의해 북촌 가회동에 살던 궁가의 여인, 이동진화는 소태산에게 안내된다.

방 교무는 "이동진화 선진의 법명은 소태산의 소재를 물어물어 만덕산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며 "'동쪽(東) 하늘에 번쩍번쩍 진동(震)한 불꽃(華)'을 통해 볼 때, 만덕산을 찾는 사건이 동진화(東震華)의 기연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하며, 권동화 선진의 구술자료를 소개했다.

'경험 없는 산길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 모르는데 날은 어두워 오고 갑자기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이때였다. 뇌성벽력 같은 큰소리가 산 위에서 울려 나왔다. "어서 정신 차려 이리 올라오시오!"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허위허위 올라가니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선생님이 아닌가. 생불 도인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네들은 반가움과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 번쩍번쩍 꽃이 피고 뇌성이 울고 비구름이 몰려오고 광풍이 휘몰아치며 거세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육타원종사문집> 권동화 구술)

이후 그는 회상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원기11년 음력 7월에 경성회원 10여 명이 경성출장소 설립 발기를 하자, 이동진화는 자신의 수양채인 창신동 605번지의 목조 초가 2동과 대지를 희사한다. 원기13년에는 인재양성소 창립연합단의 거진출진 제1회단에 소속되며, 의견제출로 양잠조력의 수수료로 단금 납입 안과 회채 보상에 관한 제의, 조실 사무실간 초인종 가설 안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교단활동에 나선다. 또 원기15년 소태산은 임시여자수위단을 최초로 구상하는데 이동진화를 수위단 단원에 임명한다. 원기18년에 전무출신을 서원한 그는 바로 경성지회 여자 교무에 임명된다. 이후 경성지부 순교, 서울지부 교무, 전재동포구호사업 후원 등 어려웠던 한국 사회 속에 처했던 교단에 최선을 다해 봉직하게 된다.

방 교무는 "그는 사업과 공부에도 정성을 다했던 선진이었지만 무엇보다 후진들에게 세정을 통해 준 상담자로 기억되고 있다"며 "당시 총부는 구조실에는 응산 이완철, 금강원에는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이 상주하면서 모든 후진들의 온갖 세정을 보살펴 주었다"고 말했다. 응산과 육타원은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에서부터 익산총부에 이르기까지 도량을 훈훈하게 감싸는 환상의 투톱이었다. 후진들이 육타원을 부를 때는 사제관계보다는 따스한 정의가 건네는 정겨운 호칭으로 여겼는데 '육타원'은 곧 어머니, 할머니와 동격이었다.

육타원은 평상시처럼 목욕제계하고 소태산 대종사 성탑을 참배하며 노년의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중 원기53년 1월16일 조반 뒤 서울에서 찾아온 교도들을 종법원으로 안내하여 종법사께 인사를 올리게 한 후 금강원에 돌아오다 갑자기 쓰러져 43시간 동안 깊은 잠 속에 빠진다. 원기53년 1월18일 결국 세수 75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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