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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의품 37장. 앉아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변의품 37장. 앉아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 장오성 교무
  • 승인 2017.08.11
  • 호수 1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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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 공부
▲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앉은 채, 혹은 선채로 죽음을 맞는 것을 불가에서 좌탈입망이라 한다. 선사들은 보통 누운 채로 입적하지만 몇몇 선사들의 경우 앉거나(坐脫) 서서(立亡), 심지어 물구나무 선 채 죽음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러다보니 좌탈입망이 수행의 경지를 보여주는 척도로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누운 채로 입적하면 수행 부족으로 인식해 일각에서는 열반한 선사를 몸이 굳기 전 좌선자세로 앉혀서 좌탈입망을 인위적으로 연출한다는 풍문도 있다.

좌탈입망 자체는 도력을 재는 척도도,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은 증거도 될수 없다. 앉아서 죽느냐 서서 죽느냐 누워 죽느냐는 법력과 무관하다. 세간에서도 요즘, 웰다잉, 잘 죽는것이 화두인데, 최고의 웰다잉(Well-Dying은 '죽음'이 아니라 생로병사에 해탈하는 '삶'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나이든 교도들은 젊은 교도들에 비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를 생사에 해탈한 공부심의 척도로 여기면 오산이다. 일반인도 나이 들면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새들도, 갈 때 되면 조용히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명이 다하면 툭 떨어지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던가.

한창 젊고 건강할 때, 눈에 넣어도 안아플 어린 자녀들을 두고,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잘 되어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해도 같은 마음일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웬만큼 나이들어 죽음을 수용하는 것은 섭리에 순응하는 것일뿐, 법력이나 공부와는 무관하다. 고장나고 찌그러진 오래된 차에 대한 애착이 새차보다 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너무 오래 살지 않고 적당할 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은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욕망의 다른 얼굴인 경우가 많다.

혹, 젊은 사람들 중에 지금 죽어도 괜찮다거나, 죽음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국가나 타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죽음의 태도는 훌륭하고 의미있고 다행한 일이긴 하지만 그 자체를 생사해탈이라 말할순 없다.

생로병사 해탈은 반드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하다.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이니라" 하신 말씀에서, 앞구절의 전제조건이 핵심이다. 앞의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뒤의 상태는 이어 일어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나고 죽는데 크게 끌리지 않는다 해서 불생불멸의 진리를 요달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생멸없는 진리를 '요달'해야, '견성'이 돼야, 참나를 '훤히 보아야만' 생사해탈이 가능하다. 일체가 공한, 텅빈 허공은 생사가 없으니, 그 '허공'이 '나'이니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생사해탈이다. 불생불멸한 자성을 보지 못하고는 어떤 인위적 노력도, 좌탈입망도 생사해탈이라 이름하지는 않는다.

생사해탈은 나이에 상관없이, 생사 없는 자리를 알아, 생사없는 자리에 머물며, 생사없는 자리를 활용하는 수행자의 건강한 '삶의 태도'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 삶이 생사해탈이다. 꽃다운 청춘이든, 자신이든 가족이든 죽음 앞에 웃고 춤출 일은 아니라 해도, 불생불멸한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천기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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