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다생의 생사 인연관…장중하면서도 여유롭게 그려내
성불제중 서원따라 인연작복 잘 짓자는 염원 담겨져


148장) 생멸 없는 고향으로
이선조 작사 / 김동진 작곡

1. 생멸없는 고향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
고락없는 그 곳에서 잠시 편히 쉬옵소서
이 세상의 애착탐착 모두 다 놓으시고
청정한 마음으로 고이고이 쉬옵소서


2. 자취없는 고향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
떠나심도 다시 오실 약속이라 믿사오니
새 몸으로 이 세상에 또 다시 오실 때엔
성불제중 크신 서원 더욱 굳게 세우소서

생멸 없는 고향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

〈성가〉 148장 생멸 없는 고향으로는 이선조 교무가 지은 천도 노랫말이다. 이선조 교무는 평소 원불교 생사관에 부합되면서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망자를 위한 노래, 즉 열반인을 잘 떠나보내는 노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죽으면 이생으로 끝이라는 단멸의 생사관을 가진 사람들과 이생을 살다가 죽으면 천당 또는 지옥에서 영생한다는 이생(二生)의 생사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시 또 태어나 만나고 만나게 되는 다생의 생사 인연관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교화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열반자와 그 관계인들에게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에 따른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바람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진산(震山) 한정원 교무의 정토가 암투병을 하게 되어 병문안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진산의 병간호 일기를 접하게 된다. 부인에 대한 지극한 간호와 정성을 보며 부부로 만난 인연의 지중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더불어 아무리 정다운 사이라 하여도 병사로 헤어지게 되는 생사의 이치를 실감하게 된다.

이에 이선조 교무는 모든 만남에 있어, 남편이 부인을, 부인이 남편을, 가족이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헤아려 평소 배우고 수행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천도법문에 근거해 이 노랫말을 짓게 된다. 이처럼 〈성가〉 148장 생멸 없는 고향으로는 원불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원불교의 생사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열반의식의 노래인 것이다. 생사의 길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걸림 없이 잘 떠나서, 성불제중의 서원에 따라 새 인연을 만나 좋은 인연작복을 지어가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성불제중 크신 서원 더욱 굳게 세우소서

〈성가〉 148장의 작사가 이선조 교무는 1절에서 '생멸 없는 고향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 고락 없는 그 곳에서 잠시 편히 쉬옵소서'라 노래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생사의 이치는 부처님이나 네나 일체 중생이나 다 같은 것이며, 성품자리도 또한 다 같은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구족한 성품이라"(천도품 5장)했다. '생멸 없는 고향'은 곧 우리의 성품자리이다. 생멸의 집착을 놓는 그 마음이 바로 청정한 자성에 머무는 것이니, 설사 자성에 계합되진 못했다 해도 그 청정한 마음을 챙기면 그 기운에 포함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선조 교무는 '이 세상의 애착탐착 모두 다 놓으시고 청정한 마음으로 고이고이 쉬옵소서.'라 이어서 노래하고 있다. 이 세상의 잡다한 애착과 탐착을 다 놓고 청정한 자성의 자리에 계합하여 편안히 쉬라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받을 때에는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하여 애착이 많이 있는 데로 쫓아 그 육신을 받게 되나니", 이 열반전후의 후생 길에서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게 된다"하시며 정신을 차려 이 천도법문을 잘 듣고 들으라고 당부했다.

한마디로 애착도 탐착도 다 놓아버리어 그렇게 눈앞에서 두렷하게 애착인 줄 알고 탐착인 줄 아는 그 마음 당체에 안주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착심을 놓아버리어 본연 청정한 본래자리에 안주하면 고락 없는 자성고향에서 쉬는 것이며, 착심경계에 끌려 청정한 본래자리에 매하면 중음(中陰)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또한 2절에서 '자취 없는 고향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 떠나심도 다시 오실 약속이라 믿사오니'라 노래한다. '자취 없는 고향'도 바로 우리의 자성으로, 이 자성에 귀의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이렇게 자취 없는 자성고향으로 떠나는 것은 이 떠나심이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더욱 지혜와 복락을 짓자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달리말해 '새 몸으로 이 세상에 또 다시 오실 때'에 '성불제중 크신 서원 더욱 굳게 세우자'는 것이다.

즉 고락 없는 청정일념에 잠시 쉬었다가 성불제중의 굳은 서원에 따라 다시 인도에 수생하여 지혜를 갖추고 복락을 장만하여 중생 제도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 원100기념대회를 앞두고 거행된 대한민국 근·현대 100년 해원 상생 치유의 유주무주 고혼을 위한 특별천도재.
〈성가〉 148장은 정산종사께서 부친이신 구산 송벽조 선진의 임종을 맞이하여 최후를 부탁한 "서원성불제중(誓願成佛濟衆) 귀의청정일념(歸依淸淨一念)"과 상통하며, 이 생사편 20장의 법구는 '성주(聖呪)'의 풀이이기도 한 것이다. 〈성가〉 148장의 1절은 청정일념을 챙기라는 당부라면 2절은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우라는 당부인 것이다.

'청정일념에 귀의하라는 것'은 '성주'의 '영천영지영보장생(永天永地永保長生) 만세멸도상독로(萬世滅度常獨露)'하는 자리이다. 눈앞에 펼쳐진 천지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자체는 원래 청정하여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히 보존해 있고 길이 불생불멸하는 장생의 자리로써, 만세에 일체의 생사를 뛰어 넘은 청정한 한마음 자리인 것이다.

또한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우라는 것'은 '성주'의 '거래각도무궁화(去來覺道無窮花) 보보일체대성경(步步一切大聖經)'의 염원이다. 현상계는 가면 오고 오면 가는 것이며 주면 받고 받으면 주는 이치에 따라 변하는 세계이다. 이렇게 오가는 거래(去來)와 주고받는 여수(與受)의 길에서 깨달음의 꽃을 무궁하게 피워 성불제중의 꽃밭으로 가꾸면 걸음걸음이 다 성스러운 경전인 것이다.

우리가 청정한 성품자리에 들자는 것은 이 성품자리에 근거해서 성품으로 오고 성품으로 생사거래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사도 성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육신 나고 죽는 것은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라"고 천명했다.

이처럼 천도는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절대계로 천도하여 다시 생사가 있는 현실계로 와서 잘 거래하자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사를 초월하고 다른 한편으론 생사를 잘 거래하는 것이다. '청정일념'은 성품의 진체로, 일체의 집착과 분별을 다 놓아버리면 드러나는 청정한 성품자리이다. 그리고 이런 청정한 성품자리에 머물러 있는 부처가 되어,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 인도수행하여 중생의 고락을 자신의 고락으로 삼아 제도하겠다는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우자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천도의 길인 것이다.

〈예전〉 〈예문편〉의 천도재 축원문을 보면 "생생에 사람의 몸을 잃지 아니하고 세세에 도덕의 인연을 떠나지 아니하여, 정법 수행을 길이 정진하여 필경은 성불제중의 대과를 원만 성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불교 천도는 천국에 태어나는 것도 극락왕생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사람으로서 밟아야할 떳떳한 인간의 길을 여의지 않고 정법을 수행해 세세생생 성불제중에 매진하자는 것이다. 천도는 나만 좋은 데로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인도수행의 이곳에서 지혜와 복락의 인연작복을 끝없이 짓고 살아가자는 공동 염원인 것이다.

성리에 바탕한 천도란 천도재라는 형식을 통해서 성품자리에 인연을 걸어 주는 것이다. 생전에 망념을 놓고 진여의 본성에 들게 하는 것이나, 후생 길에 착심을 놓고 청정한 본성에 들게 하는 것이나 방법이 다를 뿐 다 같은 것이다.

원음 산책

〈성가〉 148장 생멸 없는 고향으로의 반주를 듣노라면 장중함 속에서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마치 잎사귀 하나가 물결 따라 흘러가듯, 강물이 이 잎사귀 하나를 저 건너로 고이고이 모시고 가듯,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는 듯 하고 바람은 고요히 감싸 안은 듯하다. 그 흐름이 장중하면서도 여유롭고 한가롭다.

〈성가〉 148장 생멸 없는 고향으로는 어떤 구조적 매치에 따라 부르는 듯하다. 1절은 마치 두 사람이 이어서 먼저 사람이 청하면 다음 사람이 받아서 더욱 청하는 느낌이라면 2절은 합창으로 간절히 부탁하고 염원하는 기분이 든다.

"생멸없-는 고향으-로"의 첫 마디를 한 사람이 끌어가면 다음 사람이 낮으면서도 깊이 있는 마음으로 "떠나시는 임이시-여"를 받아 부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다시 "고락없-는 그 곳에-서"로 리드하면 "잠시 편히 쉬옵소-서"라 간곡히 받아 이어가는 듯하다.

그러면서 팔분쉼표의 깊은 쉼을 거치며 이제는 합창으로 염원을 담아서 불러야 될 듯하다. "이 세상의 애착탐착 모두 다 놓으시고"는 산 고개를 오르듯 간곡히 끌고 올라가 어느덧 고개의 정점에서 올라선 기분이라면, "청-정한 마음으로 고이고이 쉬옵소-서"는 한 고개를 넘어서서 목적지를 향해서 침착하게 내려가는 느낌으로, 당부의 합창을 부르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이 곡은 부르면 부를수록 깊이가 깊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당부와 염원의 깊이가 깊고 깊어진다.
〈성가〉 148장 참 열반에 들도록은 김동진 작곡으로 원기75년(1990) 교화부에서 성가로 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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