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보람있는 일 하고 살면 정말 행복하지"

〈불법연구회 근행법〉 읽은 후, 대도정법 한눈에 알아봐
공직생활 놓고 36세 늦깎이 출가 단행…보람으로 평생 일관

소태산은 근기(根機, indriya)란 천층만층으로 다 제각각이라 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했지만, 부처님 법을 만날 때 발동되는 종교적 소질은 다생겁래로 닦은 바에 따라 차별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근기 중에 가장 높은 근기를 상근기라 하고 예로부터 도가에서도 가장 귀히 여긴다 했다.

그런데 이런 상근기를 '정법을 보고 들을 때에 바로 판단과 신심이 생겨나서 모든 공부를 자신하고 행하는 근기'라 밝힌 소태산의 해석이 맞다면 이번에 만난 친산 이법준(81·親山 李法峻) 원로교무는 분명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한국전쟁, 그에게 남긴 것

경남 창원군 무성리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짓는 부모를 도우며 학업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처참한 광경을 다 지켜봤지. 우리집에도 4가구나 피난온기라. 중학교 시절에 수업은 얼마 안 하고 나무총 들고 훈련만 했지."

그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농촌에서 아이들이 기초교육도 못받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때 가만히 생각했지. 자력으로 봉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뜻있는 사람과 같이 그 아이들을 위해서 야학도 개설했어."

22살에 입대해 배치받은 철원에서는 쑥대밭이 되어 방치된 철원시와 무너진 철책선을 마주해야 했다. 참담한 한국의 현실을 마주한 그는 종교는 없었지만, 매일 천지신명께 '한반도가 평화롭게 통일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불법연구회 근행법

일생을 봉사하며 살겠다고 생각한 그가 선택한 직장은 법원서기였다. 24세부터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봉사생활하며 일생을 살겠다'는 그에게 천직이었다. 등기, 호적, 민사, 회계 등 다양한 업무를 배우면서 결혼도 했다. 봉사하면서 복도 짓고, 일을 배우면서도 보수도 받는 생활에 대해 그는 늘 은혜와 보람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에게 문득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는데 '내 마음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이 든기라. 나름대로 책을 찾아 읽기도 했는데 잘 이해도 안 되고…."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는 그에게 어느 지인이 어디서 얻어온 〈불법연구회 근행법(佛法硏究會 勤行法)〉을 그에게 줬다. 그에게 신세계가 열렸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는데 왜 요란하게 살았나 싶데. 우리 마음이라는 게 파도야. 인생 파도를 적극적으로 잘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구나,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이구나하면서 정리가 되더라고."

원불교 만난 기쁨

황홀한 기쁨을 안고 물어물어 원불교를 찾았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은 곳이 대신교당이었다. 당시 교무였던 지성인 교무에게 원불교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문의하니 아침 좌선부터 한다는 말에 좌선도 독학으로 정진했다. "공무 일정으로 바빠서 아침에 참석을 못하겠어서 저녁에 혼자 했어. 혼자 선하면서 마음도 뭉쳐지고 머리도 시원해지고. 흠뻑 재미 붙였지."

처음 인연은 대신교당이었지만 공무원 직분상 전근을 다니면서 마산교당, 진주교당, 부산교당 등 여러 교당을 다녔다. 이때 다양한 청년회 활동과 법동지들은 또 하나의 보람이 됐다. 각종 교당행사, 청년회 결성, 연원교당 내는 데 도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의 활동 경력을 대변해 주듯 당시 부산교구 청년연합회 부회장, 중앙청년회 부회장도 맡았었다.

"당시 교당생활과 청년회 활동에 푹 빠졌지. 그런데 부산교당 청년회가 잘 안되는기라. 부산교구 청년연합회를 위해서라도 부산교당 청년회를 꼭 살리리라는 마음이 생겼지. 그래서 대신교당 교무님에게 '부산교당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허락해 주시더라고."

이런 기연으로 그는 부산교당의 항타원 이경순 종사를 만난다. 그를 본 항타원 종사는 "저 사람 잘봐라. 옛날에 수도한 사람이 왔다"며 그를 아꼈다. 그도 항타원 종사를 알뜰히 모셨다. 교당의 잔심부름은 그가 다했다. 그리고 항타원 종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결정적 역할도 하게 된다.

"부산에 보화당 설립할 때 한의사들이 이권 때문에 허가되는 것을 막는기라. 그래서 알아보니까 구청에 담당하는 직원이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힘 좀 써달라고 했지." 법원서기를 하면서 쌓은 인맥과 경력은 부산 최초 보화당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36세 늦깎이 출가 단행

"항타원님을 만나뵈니 참 법이 높으셨거든. 나는 한 80년 교당 댕기고 다음생에 전무출신하려고 했는데…. 이 어른을 뵈니까 공연히 출가하겠다는 생각이 나뿐기라. 법무사 하는 것보다 전무출신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제."

항타원 종사께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대산종사를 찾아봬 출가 승낙을 받고 오라'고 했다. 그가 대산종사를 찾았을 때 또 다른 사람도 전무출신 승낙을 받기 위해 있었는데, 그가 우산 최희공 원무였다.

"그때 대산종사께서 '최희공 너는 대학가라. 할 일 있다'고 하셔. 나는 '전무출신해라'고 승낙하시고."
13년 법원서기 생활을 뒤로한 채, 36세 늦깎이로 출가한 그는 동산선원 입학 5개월을 앞두고 영산사무소에서 지냈다.

"영산에 가니까 남궁성·김성관 교무들이 계셨어. 그 분들이 '형님, 법대 나왔으니까 야간대학 학생들 좀 가르쳐주소'라고 하는기라. 보람있는 일이다 싶어 찾아갔지."
당시 영산 동네에는 대학을 못 간 16명 청년들이 있었다. 예전 야학을 세웠던 기억으로 그곳에 가보니 송인걸 예비교무(당시 간사근무)가 영어를 가르치는 모습을 봤다.

"대단했지. 영어를 가르치는데 유창했거든. 나중에 알고보니 경북고 나온 수재인기라. 학생들을 항상 기쁘게 주인정신으로 가르치는데 감동받았지."
보람있는 영산생활을 마치고, 동산선원에 입학했다. 당시 원장이었던 훈타원 양도신 종사께 성리문답도 즐겨했다.

신심 속에 핀 교화불공

원기71년 드넓은 동명훈련원에 혼자 발령받았을 때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운영을 잘 할 수 있는지가 화두였다. 화두를 들면서 기도와 선을 하다가 문득 법신불 사은께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합니까?' 적공하는 어느 날 좋은 생각이 일어났다. '불공이 있지 않느냐'고 응답을 받은 것이다. 교전에서 불공법을 찾아 공부하다가 천일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숭아, 자두 농사도 하면서 후임교무에게 100만원까지 남겨줬다.

교도가 하나도 없는 옥포교당에 발령받았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옛 교도들을 찾아 순교다니며 법문을 돌리기도 하고 천도재도 지냈다. 어느 교도는 일 나가며 애들 봐달라고까지 하자, 하루종일 아이들하고 놀기도 했다. 이런 정성에 하나둘 교도가 생겨, 〈정전〉·〈대종경〉 화요공부방을 하면서 기반을 마련했다.

불목교당에서는 마을 이장부터 찾아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숙원사업이 뭐냐. 돕겠다'고 말이다. 마을교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마을 도로포장과 놀고 있는 마을 사람들 일자리가 숙원사업이라 했다. 공무원 생활했던 기지를 발휘해 공문서를 만들어 새마을지도자를 찾았으나 소식이 없었다. 얼마 후 새마을지도자의 어머니 초상이 났는데 교도들과 조의금을 들고가 천도재를 지내주니 감동을 받아 도로포장 숙원사업이 성사됐다. 마을 사람들 일자리는 퇴임 후 소남훈련원에 주재했던 발타원 정진숙 종사에게 부탁해 일을 하게 만들었다. 마음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세정도 밝아지면서 점점 신뢰를 얻어갔다. 일을 시작한 지 한달여가 지나자 마을사람들은 하나둘 교당에 다니기 시작해 교화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발령받은 상주선원에서는 자금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새 건물 공사를 마무리했다. 부곡선교소도 숨은 유지를 발굴하는 등 법신불 사은님의 응답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남은 간절한 염원

"지금은 평화번영의 한반도, 국민의 나라, 남북통일 등 다 잘 살도록 기도해." 그는 단번에 원불교가 대도정법임을 알아보고 기도와 봉사를 낙으로 삼아 살아온 인생이였지만, 어릴적 겪은 참담한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에 대한 안타까움은 여전히 간절했다.

"한평생 보람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인기라. 인생은 경험하면서 크고 또 성숙하는 법이거든. 앞으로는 반드시 한반도 남북통일도 이루고 세계를 책임지는 우리가 되어야 해." 평화기도를 평생 올렸던 그의 목소리에 숙연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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