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소태산 대종사는 3.1 운동의 후유증과 가중되는 탄압 속에서 9인 제자들에게 백일기도를 제안한다. 4월26일부터 8월11일까지 백 일간의 산상기도였다. 도롱이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청수 그릇 들고, 병에 물을 담아서 올라가게 하셨다. 당시에 매우 귀한 회중시계도 사주며 9인 제자의 마음을 집중시키며 기도하게 했다.

100일째 되는 날, 아직도 사념이 남아 있으니, 창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목숨도 내어 놓겠는가 하고 물으신다. 아무 대답이 없자 또 말씀한다. 미련이 남거든 말하라, 생명을 바치지 않고도 길이 있다. 조금이라도 불안한 생각이 끼어들면 비록 열 번을 죽어도 천지신명이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모두 비장한 태도로 희생하겠다고 다짐한다. 열흘 간 더 기도하고 21일에 자결키로 하였다.(〈소태산 평전〉,김형수)

8월21일은 법인절이기 이전에 자결하기로 한 날, 흔쾌히 죽기로 한 날이다. 마침내 사무여한이라는 글귀 아래 맹세의 날인을 하였고, 혈인이 나타났다. 혈인이 나타나자 죽음을 결행하러 가던 제자들을 불러 자결을 멈추게 하셨고, 깊은 밤, 중앙봉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고 돌아온 9인에게 대종사는 법명을 주시며 말씀한다. "그대들의 전 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공명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대종경〉 서품 14장)

기독교에 부활절이 있다. 법인절은 원불교의 부활절이다. 대종사께서 9인 제자들을 죽게 했다가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다시 살림'이 부활 아닌가. 9인 제자들은 8월21일, 법인절에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하신 것이다. 생물학적인 죽음과 부활이 아닌,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죽음과 부활 말이다.

왜 대종사는 '다시' 살린다고 했을까. 그것은 곧 죽음을 강조한 말씀이다. 사실, 백 일간의 기도는 온전히 죽음의 과정이었다. 9인 선진들은 세속의 나, 개인의 소아에 사로잡힌 나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백 일 간 죽여 온 것이리라.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 이 언명 또한 매우 절실하다.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왜 기도를 했던가? 그것은 인류 구제, 창생 제도가 그 목적임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우리가 법인절을 기념하고 아홉 분 선진을 봉대하는 뜻은 바로 이런 원대한 목적으로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원불교인들도 법명을 받고 다시 살아나 창생 제도라는 서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가마솥 같이 더운 여름을 건너가며 만나는 법인절에 묻는다. 오늘 나에게 죽여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이지 못해 끌어안고 사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부활하고 있는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창생 제도의 목적을 반조하며 실행하고 있는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법인절, 부활절은 참으로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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